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꽃봉오리 터지는 춘사월 화사한 봄, 추위에 웅크렸던 마음들이 기지개를 켜며 너나 할 것 없이 대자연의 유혹에 이끌립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저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를 찬양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이에 대해 누구도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

개혁자들 역시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자연을 하나님의 그림책으로, 하나님 사랑의 게시물로 노래했습니다. "온 천하 만물은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저 푸른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주 하나님의 사랑을 늘 속삭이지요(찬 201장)".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의 저자이며,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신랄한 공격자 메이첸(J. Gresham Machen)도 자연애호가였고, 복음주의 목사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는 특별한 조류 애호가였고, 1년 중 40일을 따로 자연 속에 머물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일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연을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을 넘어 특별계시와 동일시한 자들로서, 자연 만물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만유인력설을 발견한 계몽주의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입니다.

그는 주일날 꼭 교회당에서만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중충한 예배당에서 어줍잖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느니,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로 충만한 자연으로 나가 자연이 들려주는 영음(靈音)을 들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꼭 성경을 읽을 필요는 없다. 자연이 제2의 성경이다"라고까지 주장하며, 자연계시를 특별계시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만큼, 지나치게 나간 이들이 있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로 대변되는 자연신비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범신론을 넘어 범재신론(Panentheism)적 신관-세계와 창조주를 구별하되, 분리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을 가진 자들입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을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새와 소나무와 짐승들에게 설교했으며, 설교를 들을 때 그것들이 다양한 반응을 했다고 합니다.

로마가톨릭의 성당(聖堂) 개념, 마리아와 예수상 숭배,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는 화체설 등 도 같은 아류입니다. 물론 여기선 프란치스코의 범재신론(Panentheism) 같은 극단주의는 논외로 치고,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동일시하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이 자연만물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느낄 수 있었던 타락 전 시대에도-그것들만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못되기에-말씀이신 성자 로고스(λόγος, 요 1:1)가 계시해 주셔야만 알 수 있었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타락 후 희미해진 자연 계시만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오늘날 호젓한 자연 속에서 소위 하나님의 영음(靈音)을 듣고, 관상과 침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이들은 다 자연신학의 아류로 보이며,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체험이라는 것도 성경적 근거가 희박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오직 복음과 성령으로만 만나지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 만나지 않는 하나님-심지어 하나님 말씀(?)을 매개로 만났다 하더라도-은 하나님이 아닌 악령이라고까지 독설했습니다. 자연의 영음(靈音) 운운하며 자연계시에 탐닉하는 이들은, 그들이 아무리 신비함과 고상함으로 포장해도, 성령 없는 본성적 종교인임을 스스로 증거할 뿐입니다.

또한 자연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자연 우상화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이성을 우상화하는 이성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이데올로기에 매몰시켰듯, 범신론과 연계된 자연신학은 자연우상화에 빠집니다.

이것을 일찍이 깨닫고 경계했던 사람이 욥(Job)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해와 달을 보고,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반하여(해와 달을 경배하는 표시로) 손으로 입맞춤을 띄워 보내기라도 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욥 31:26-27)."

욥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마음이 탈취당하는 것을 하나님께 벌 받을 죄로 여긴 것은 자연의 우상화에 대한 경계의 발로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뉴에이지(New Age)에 대한 경계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20세기만의 산물만이 아닌 욥 시대에도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자연우상화는 원시의 범신론적 자연숭배 형태와는 달리, 시대에 걸맞는 현대 의상, 뉴에이지로 갈아입었습니다.

이제는 달에게 절하는 것으로가 아닌, 자연과 그 자연에 반응하는 인간 감성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우상화의 형태를 취함으로서입니다. 바야흐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절대적 지위가 배제된, 종교의 문화화 혹은 문화의 종교화입니다.

이즈음 그리스도의 땅 이스라엘을 한 번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일찍이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Canaan, 복락원)으로 일컬었던 이스라엘은 그 별명과는 달리, 매혹적인 자연 풍광이나 마음 붙일 만한 곳이 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사 40:3; 마 3:3).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을 그렇게 척박하게 두신 의도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몰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위시해서 당시의 엣세네파들이(Scribes and Essenes) 자신들을 은둔시키며 오직 기도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유대 광야 덕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40일씩 두 번이나 기도에 몰입할 수 있게 한 것 역시, 그것이 황량한 민둥 돌산이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탈취할 만한 화려한 자연이 없었기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시 24:6)"라는 그들의 별명답게, 하나님께 자신들을 몰입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황량함이 하나님을 향한 몰입을 낳게 했고, 그 몰입이 영감어린 문학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이는 광야 백성의 책인 성경의 문학성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영혼에서 피어나는 영감어린 사유(思惟), 문학적 시상(詩想)도 꼭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그 시원(詩原)은 아니며, 그런 감성을 일깨우는데 반드시 그것들이 필요한 것도 아님을 말해줍니다.

잠언 3천과 시가(詩歌) 1천 다섯 수를 지을 정도로(왕상 4:32) 문학적이었던 솔로몬, 전체 시편의 절반 이상(76편)을 지은 목가(牧歌)적 시인 다윗의 문학적 감성은 자연의 자양분으로만 길러진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은혜가 빚어낸 산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자 치고 시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기독교 금언이 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목자(牧者)의 시, 시편 23편도 선입견 없이 읽으면, 시인이 마치 평화로운 전원을 유유자적하며 지은 것 같지만, 사실 그 시원(詩原)은 그런 여유와 풍광과 상관없는, 적에게 쫓기며 죽느냐 사느냐 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고 보살펴주신 사랑을 시상(詩想)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분출되는 문학성, 예술성의 원천(源泉)이 단순히 자연의 영감이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성경과 찬송시들의 영감어린 문학성도, 그리스도와 구속의 아름다움에서 발현된 것들입니다. 슐람미 여인은 그리스도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아 1:14)",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2:3)"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입은 핏빛 홍포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향취어린 의상으로 칭송됩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와라 그 향기 내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 주실 때(찬 87장)."

그리고 그리스도가 흘린 대속의 보혈은 더 없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향취로 송축됩니다. "내 몸에 밴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십자가의 전달자)".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시니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됩니다(찬 415장)".

그리스도의 머리에 둘린 가시 면류관에 대한 찬가는 세상 정복자의 면류관을 무색케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왕의 왕 모든 왕의 왕 저 가시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그 얼굴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 장엄한 그 사랑 내 가슴 울리네(찬 153장)".

다시 말하지만 거듭난 성도의 마음에 품긴 아름다운 시상(詩想)들은 꼭 자연(natur)이 그 시원(詩原)이 아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 뿌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지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가 평생 탐구했던 신학 주제는 그가 저술한 책제목 그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Jonathan Edwards lover of God on beauty)이었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역시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A Peculiar Glory)>이라는 저서에서 "내가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남은 이유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의 행복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어디 조나단 에드워즈, 존 파이퍼 뿐이겠습니까? 구속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유일한 찬송 주제이고 평생 추구할 탐미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입은 영광이나 자긍심 역시 세상의 부나 지위로부터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인간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인간 세상의 화려함의 극치인 솔로몬의 영광이, 하나님이 창조한 한 떨기 백합화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이긴 백합화의 영광은 하나님의 자녀가 입은 영화와 존귀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입은 "영화와 존귀(시 8:5)"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義)를 뚯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천상천하 인간이 입을 수 있는 지고의 영광입니다. 이 의가 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했고(갈 4:5), 영생의 후사가 되게 했습니다(딛 3:7). 사단은 역사 이래 이 존귀와 영광을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방해해왔고,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사단의 미혹을 받아 세상 영광에만 동공이 확장 되어있고, 하나님의 존귀와 영화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천지에 꽃 향연이 펼쳐지는 춘사월, 만개한 꽃들의 유혹이 극에 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들썩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심신의 휴식을 취하고 생기를 충전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그것을 누림에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춘(賞春)한답시고 나간 꽃길에서 자연의 풍광에만 매료되어 거기에 발목잡혀 버린다면, 상춘은 커녕 영혼만 탈탈 털리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