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을, 키에르케고어 전문가 이창우 목사님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로 들려 드립니다. 이번 시간은 '실존과 선물' 마지막 편입니다. -편집자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

모든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그 어떤 선물도 버릴 것이 없다면, 저주로 보이는 선물도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그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좋고 완전한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당신께 묻겠습니다.

기쁨이 흘러넘칠 때, 하나님께 감사했나요? 슬플 때, 감사했나요? 힘이 강하여 어떤 도움도 필요 없을 때, 감사했나요? 힘이 약할 때, 감사했나요? 할당된 몫이 적을 때, 감사했나요? 할당된 몫이 고통이었을 때, 감사했나요? 소원이 거절당할 때, 감사했나요? 조롱당할 때, 감사했나요? 장미꽃에 감사했나요? 장미꽃 가시에 감사했나요?

물론, 감사한다 해서 불의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한다 해서 악인이 선해지는 것도 아니지요. 저는 그렇게 말할 만큼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불의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몫이라는 겁니다. 이것과 별도로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런 모욕과 불의를 하나님께 가져갔습니까? 그런 불의를 그분께 돌려드리고, 감사함으로써 그분의 손에서 그것들을 좋고 완전한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분께서 주시는 것은 언제나 좋고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겁니다. 이 말씀을 당신의 구원이 되도록 사용한 것이지요. 기도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 약속이 보장된다는 것도 아름답지요(살전 5:17). 그러나 항상 감사하는 것은 더욱 복이 있습니다. 당신이 모든 천사들이 불타는 혀처럼 말하는 것보다(행 2:3), 이 말씀을 더욱 영광이 되게 해석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용기와 믿음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항상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독자, 당신은 어떻습니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나요?

오히려,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지만(요일 4:19)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 하나님은 신실하지만 우리는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딤후 2:13), 하나님은 불타는 열정이 있었지만 우리는 미지근했다는 것, 하나님은 좋은 선물을 주셨지만 우리가 해롭게 바꿨다는 것, 하나님은 부르셨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은 다정하게 말을 걸었지만 우리는 무시했다는 것,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셨지만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는 대신 새로운 소원을 말했다는 것,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셨으나 우리는 올바르게 소원하지 않고 화내기에 급했다는 것.

저는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자, 당신도 저와 비슷한 입장이라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고백의 아픔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했나요? 이런 아픔을 싸게 팔아 치우는 영리함의 술책을 거부했나요?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서술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다니! 이런 사실에 슬퍼한 적이 있나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적이 있었나요?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은 사랑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만큼, 자신을 판단하기에 신속했나요?

만약 당신이 그랬다면, 일어난 일들이 낯설게 보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 겁니다. 온갖 좋고 완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이해할 용기를 얻었을 겁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바리새인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저런 나쁜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며 기도했지요. 바리새인의 감사는 정당한가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이런 의미 없는 말에서 심오한 의미를 발견할 만큼 우리는 영리한 건가요? 우리는 가끔 비교에 의한 감사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너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할 수 없고 화가 나고 질투심이 생기니까, 너보다 못난 사람과 비교해. 그러면 하늘에 감사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 못난 것은 감사의 조건이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살전 5:18)?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야 하지요.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남보다 우월한 정도에 비례하여 감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교에 의해, 완전성에 비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그때 이 사랑은 완전성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랑이 이런 사랑일까요? 회개를 낳는 사랑입니다. 회개를 낳는 사랑은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낳는 사랑은 어떤 사랑보다 더욱 신실하고 강렬하지요. 왜냐하면 회개할 때, 당신을 사랑하는 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니까. 세리는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죄인입니다." 세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세리가 받은 의는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의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의뿐이겠습니까? 세리처럼 회개할 때, 당신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심지어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의 눈에 보이는 아이의 선물과 같습니다. 어버이날 부모가 받은 감사의 선물도,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가 먼저 준 용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사랑하는 독자, 당신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조차 불완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 안에 행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준 감사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을 당신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어린아이와 같은 행복에 이르는 깊은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먼저 사랑했던 그 사랑을 이해하기 두려워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