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을, 키에르케고어 전문가 이창우 목사님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로 들려 드립니다. 지난 주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성령의 선물'을 말했다면, 이번 주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키에르케고어가 보았을 때 기독교 세계에서 말하는 믿음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믿음 같지 않는 믿음을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세상에서 사람을 믿거나 신뢰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믿음은 위로부터만 주어지는 초월적 선물입니다. 자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저는 사도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저의 연약함을 고백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의심 많고 부족한 자였는지, 얼마나 주님을 믿지 못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낭비했는지.

"온갖 좋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 그분은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약 1:17)."

저는 이 말씀을 갖고 독자, 바로 당신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받기 어려운 말씀인지, 이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나 이 말씀을 받을 때, 얼마나 큰 축복과 선물이 예비되었는지.

아마도 이 말씀, 이 놀라운 하늘의 지혜, 영혼에 단비 같아 벌컥벌컥 들이마셨을 겁니다. 친절한 운명이 당신을 안내할 때, 친절한 운명이 언제나 당신 편일 때, 이 말씀은 꿀맛이었지요. 그래서 과식했고, 배탈이 났겠지요. 아마 지금은 소화불량일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인생은 수수께끼가 되었으니까요. 인생이 수수께끼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철이 든 겁니다. 친절한 운명의 이유식만 먹었던 자들은 인생이 수수께끼라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그러나 아마 지금 당신은 친절한 운명에게 버림받았겠지요. 이유식이 아니라, 거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익히지 않는 날것을 먹어야 할 때, 처음으로 이 말씀을 의심했을 겁니다. 정말로 좋고 완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오는 것인지,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맞는지. 비로소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데, 의심이 싹텄겠지요. 이제 이 말씀을 다 토해 버리고 싶을지 모르겠네요.

"당신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텐가? 언제까지 나를 선물로 이럴텐가? 그만 가 주게. 선물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마 속에서는 이렇게 요동칠 겁니다.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오직 이 사람만이 이 말씀, 이 놀라운 하늘의 지혜를 마음에 품었던 겁니다.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당신은 이럴 겁니다.

당신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보석을 갖고 있습니다. 굉장히 값비싼 보석이지요. 평소에 몸에 차고 다니기에는 아까운 보석. 그래서 지금 장롱 속에 있고요. 가끔은 장롱을 열고 보석을 감탄했지요.

"대단한 보석이야.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 보석을 평소에 차고 다니기에는 아깝지. 그래, 인생의 축제일이 오기를 기다리자. 그날이 오면 이 보석이 얼마나 귀한지 세상이 알게 되겠지!"

아마 당신은 매일 인생의 축제일이 오기를 기다렸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날은 오지 않았고요. 그 날이 온다면, 인생의 축제가 시작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온갖 좋고 완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조용한 슬픔이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의심은 더욱 커져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았지요. 단지, 친절한 운명이 당신 편일 때, 친절한 운명이 언제나 당신을 도울 때, 이 진부한 지혜의 말씀을 살피지 않은 것뿐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은 이해하실 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당신은 기적을 바란 것도 아니지요. 요행을 바라지도 않았지요. 아이처럼 순진하게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도 아니지요. 단지 증거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단 하나의 소원만 품고 있었으니까요.

이 소원만 들어준다면, 지금 힘들어도 괜찮다. 이 소원만 들어준다면, 지금 버림받아도 괜찮다. 이 소원만 들어준다면, 지금 희생당해도 괜찮다. 이 소원만 들어준다면, 완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입증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소원조차 거절당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소원의 열정에 농락당했지요. 이 소원에 안정성을 잃었죠. 그렇다 해서 반항하거나 하늘에 저항하고 삿대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늘을 시험하려 한 것은 아닌지.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시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아마도 당신은 다시 가능성의 첨탑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실낱 같은 가능성을 염탐합니다. 오, 가능성이 보이는 군요. 실낱 같은 가능성만 보인다면,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이 소원은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이 소원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이 소원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평안, 나의 행복, 나의 미래입니다. 저는 힘들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모든 노력,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 불장난이 되었군요. 평안을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고요. 당신은 가능성의 첨탑에서 내려왔습니다. 슬픔에 마취되어 기력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많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날은 갔고, 다시 아침이 오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만 흘러갔지요.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기대했던 그 축제일은 결국 오지 않았고요.

그때, 당신은 소원을 단념했지요. 하늘은 당신을 버린건가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부지불식 중에,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온유함'을 발전시켰던 겁니다.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온유한 자니까요.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하늘은 당신의 어리석은 소원과 갈망을 바꾼 겁니다. 하늘은 대신에 당신에게 하늘의 위로와 거룩한 생각을 준 겁니다. 하늘은 당신의 소원을 거절할 때, 선물을 준 겁니다. 하늘은 당신을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모든 소원이 철옹성처럼 당신을 에워싸고 있을 지라도, 당신의 소원이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기껏해야 온 세상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당신의 소원 대신에, 당신이 하나님을 얻고 온 세상을 이길 믿음을 선물로 준 겁니다(요일 5:4).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