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번 시간부터는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을,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로 들려 드립니다. -편집자 주

저 야고보 사도는 항상 의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나의 형으로만 생각했었죠. 나는 우리 형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어릴 적,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던 형이 어느 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며 밖으로 돌아다녔을 때, 믿기 어려웠죠.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을 몰아내고 왕이 된다?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사렛의 조그만 촌구석에 살고 있는 목수의 아들이! 또한 저는 그분의 친동생이었죠!

제가 예수를 저의 형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그 분이 부활하시고 난 후였습니다. 아마 나만큼이나 실족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나만큼이나 믿음과 의심 사이를 고민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지요(약 1:6). 그리고 제가 그런 사람이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한 겁니다.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약 1:8).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저는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선물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도대체 어디에 오는 것인지, 어떻게 우리가 선하고 완전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분명한 것은 온갖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약 1:17). 다시 말해, 우리가 주고받는 어떤 선물도 선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태초에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덴동산은 선하고 완전한 곳이었지요. 사람들은 에덴동산에 대하여 별별 말들을 다 쏟아냅니다. 지상 낙원이라는 둥, 행복의 공간이라는 둥, 이상향이라는 둥. 그러나 '선물의 공간'이라는 말만큼, 에덴동산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에덴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공급받았지요. 에덴을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선물밖에 없지요. 선물을 생각해 보세요. 선물은 무조건적으로 줍니다. 돌려받지 않지요. 무조건적인 '드림'만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에덴, 어떻습니까? 따라서 이곳은 낙원이지요.

하늘의 축복은 동산 전면을 덮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충만함 자체였고요. 양이 늑대와 함께 뒹굴고 놀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그런 동산이었답니다(사 11:6-8).

그러나 인간은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고 금기를 깼습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창 3:6). 이 열매를 따 먹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눈이 밝아졌지요. 지식의 나무였으니까요.

그 이후, 인간에게는 온갖 잡다한 지식이 들어왔죠. 손실의 고통에 대한 지식, 소유의 의심스러운 기쁨에 대한 지식, 분리와 두려움에 대한 지식, 법의 심판에 대한 지식, 법의 정죄에 대한 지식, 상실의 아픔에 대한 지식, 죽음의 고통에 대한 지식과 같은 것들....

아담과 하와가 금기를 깨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을 시간조차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주는 자가 누구인지 묻지 못하도록, 모든 만물은 새롭게 공급되었으니까요. 에덴동산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지식을 탐하다가 상실한 것은 에덴의 선물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들었던 선물의 공간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동산에서 추방당하여 '에덴의 동쪽'으로 이동하지요. 그곳은 죄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이를 낳고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이름과 성의 이름이 같습니다(창 4:16-17). '에녹', 에녹은 '시작, 개벽'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는 다른 전혀 다른 의미의 창조, 시작, 개벽! 인간 문화의 시작이었지요. 그 이후 문화를 창조한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바로 그의 후손들이죠.

도대체 에덴과 어떤 문화의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에덴이 '선물의 경제'라면, 에덴의 동쪽은 '거래의 경제'입니다. 선물이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거래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후, 세상은 온통 거래가 되었답니다. 에덴을 상실한 인간이 대체된 에덴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겁니다. 그 결과, 거래의 세상이 탄생한 겁니다.

아마 여러분도 거래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겠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 방식이니까. 그러나 선물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지요. 선물은 받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뿐더러, 생긴 건 멀쩡한 선물이지만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면 '뇌물'이 되고 말지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입니다. 확실한 건, 그것이 에덴의 산물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많이 불행한지 모릅니다. 거래의 경제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불안하다, 주가가 폭락했다, 시장의 소비가 위축됐다와 같은 소식이 들려오면, 마음이 벌써 요동칩니다. 거래는 항상 준 만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계산을 시작합니다. 절대 손해보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계산해야 하지요.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게 된다면 화를 내고 싸움은 시작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지식의 열매를 탐한 인간의 잘못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 지식의 열매는 여전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지식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에덴을 돌아보십시오. 인간에게 들어온 이런 지식은 기만, 사기의 산물입니다. 태초의 지식은 바로 뱀의 유혹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또 인간은 자신 속에 지식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지식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지금까지 자라왔습니다. 동시에 거래의 규모도 커졌지요.

이제 에덴의 문은 닫혔습니다. 에덴은 '선하고 완전한' 선물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이 닫힌 겁니다. 모든 것은 변화됐고, 인간은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은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무엇이 선인지, 완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지식은 자신과 함께 의심을 데려왔지요.

"자, 이 열매를 먹어봐.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걸. 선악을 알게 될 거야." 의심은 인간의 마음을 의심으로 둘러쌌답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은 더욱 인간을 단단히 의심으로 조였고요. 의심은 언제나 인간들에게 제안하지요.

"그 거래 이상해. 다시 계산해 봐. 문제가 있어. 손실이 생길 걸?"

의심은 손해보지 않는 거래를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쌓으라고 충고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무엇을 가져가려 하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한 지식을 요구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지식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의심과 지식은 한 패거리입니다.

그러나 선물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거저 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으니 마음도 평안하지요. 많은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준 것에 감사하지요.

선물은 의심하는 한 받을 수 없습니다. 거래는 투명성을 요구하지만, 선물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포장된 선물, 인식 불가능한 선물은 무조건적인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거래는 무엇을 받는지 알지요. 그러나 선물은 무엇을 받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도래하는지도 모르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선물인 줄 알고 받았던 것이, 폭탄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이 선하고 완전한 선물임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의심 많았던 제가 여러분께 한 말씀드립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약 1:17)".

과연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걸까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