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2] 닥터 스트레인지(下)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는 기표의 기능을 훌륭하게 각색하여 가르친다. 스티븐 스트레인지(Stephen Strange)의 스승이 된 에인션트 원(Ancient One)의 첫 강의는 기표(signifiant, 특정한 의미를 담아내는 문자와 그 음가)와 기의(signifié, 특정한 문자와 음가들에 결합된 의미)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스틱 아츠(mystic arts)의 언어는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고대의 술법사들은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일을 '주문'이라고 명명했어요. ... (이 언어는) 현실을 형성하는 소스 코드입니다(The language of the mystic arts is as old as civilization. The sorcerers of antiquity called the use of this language 'spells'... the source code that shapes reality)".
영화에서는 간단히 서너 문장으로 진술된 말이지만, 이 말 안에는 언어에 대한 중요한 논점들이 집약되어 있다. 우선 실재론(realism)이 눈에 들어온다. 실재론이란 우리가 관념으로만 알 수 있는 보편적 개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실재론 측면에서 보면, 이 보편적 개념들에 상응하는 용어를 구성하는 문자와 음가는 단지 기표에 그치지 않고 그 실재의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힘을 갖는다.
영화에서 미스틱 아츠, 즉 신비로운 기술의 언어는 "현실을 형성하는 소스 코드(source code)"로서, 그 안에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소개된다. 현실이 각 기표가 지시하는 기의에 상응하는 개념들에 의해, 혹은 이 개념들의 조합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단순히 생각의 단편들을 일반화시킨 것이 아니라, 현실을 현실되게 만들어주는 기본적인 원리와 힘으로 보아야 한다.
기표에 연관된 개념에 대한 이런 사고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낯선 것일 수 있다. 사실 현대인은 언어를 주로 의사전달과 소통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 여길 뿐이며, 언어가 초월적 실재와 어떤 특정한 방식의 연관을 가능케 한다는 생각에는 익숙하지 않다. 언어를 보편적 진리인 초월적 실재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일은 경전을 중시하는 종교인들이나, '더 시크릿(The Secret)'과 같은 종류의 정신수양에 관한 상업화된 가르침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사고는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그 가운데서도 플라톤의 이데아(ἰδέα)론에서 확연하게 발견된다. 플라톤은 육체로 감각되는 물질의 세계 전체는 가상에 불과하며, 진정한 존재는 형상(εἶδος)의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이데아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데아가 모든 개별적 사물과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게 있어 개념이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이 실재를 기의로 삼는 언어의 기표는 다변화된 가상의 세계를 판단하고 영혼의 고양을 가능케 하는 통로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데아와 기표의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사유는 플라톤의 독자적 창작물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개념이 곧 실재이자 진리이자 영혼의 빛이라는 사상은, 이미 주전 8세기경 호메로스(Homer)의 신화에서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는 만물이 신들의 권능에 의해 생성되고 살아 움직인다는 물활론적(hylozoic) 사고에 따라, 언어의 기표가 이 힘을 지시하고 표현하고 혹은 활성화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내비치고 있다.
호메로스의 신화에서 신들의 언어는 곧 현실세계를 구성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인간도 그 언어를 빌려 신탁을 받고, 신들에게 기도하고, 혹은 신들의 힘을 차용하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 기표는 단순히 생각의 단편들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묶어 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들의 힘을 빌리고 그 지혜를 엿보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 유적과 유물에서는 이처럼 신들과 그들의 신성에 상응하는 기호들(문양, 상징, 칭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 학파(the Pythagorean school)의 경우 숫자와 기하학적 문양도 우주를 구성하는 신들의 근원적인 힘을 입증하고 차용하는 길로 여겼다.
영화는 이런 실재론적 사고, 그 가운데서도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Pythagorean-Platonic tradition)에 충실한 기표이론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본 영화가 다중우주 이론을 선보이며 내세운, "사고가 실재를 형성한다"는 생각에는 역행하는 것이다. 실재론의 관점으로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실재론에서는 실재적 진리인 기의가 보편적인 단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가 실재를 형성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언어 역시 자유롭고 임의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기표는 특정한 실재나 개념에 귀속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기의들을 창조해낸다. 동일한 기표라도 사람들마다 그 기표에 상응하는 기의를 다르게 그려내며, 그것이 각자에게 고유한 진리로 여겨지고 또 그런 입장이 존중받는다.
그러므로 다중우주 이론은 실재론적 기표이론의 관점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우며, 기의가 초월적 실재와는 전혀 무관한 임의적 고안물이라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구조주의 기호이론(structuralist semiotics), 혹은 더 나아가 기표와 기의의 이런 임의적 결합이 결코 고착되지 않고 사람과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포스트구조주의 기호이론(poststructuralist semiotics)에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실재론은 사고의 임의성과 자유보다는 고정불변의 유일한 실재적 진리에 사고를 적중시키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다중우주 이론과 실재론적 기표이해는 하나의 플롯 안에서 병렬이 아닌 직렬로 연결될 경우 내적 모순을 유발한다. 이 영화는 그런 내적 모순을 과감하게 포용한다.
왜 그런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제작자 측에서 이 내적 모순을 얼마든지 소화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어떤 모순이 담겨 있는지를 제작자가 미리 확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순마저 엔터테인먼트로 승화시키는 강렬한 브리콜라주(bricolage) 기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듯하다.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플라톤적 실재론과 구조주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 기호이론, 종교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묘한 뒤섞임이 영화의 사상적 모순마저 녹여내며 관객의 감각적 만족도를 높여준다는 것이다.
둘째는 힘에 대한 욕망이다. 영화는 다중우주 이론을 통하여 사람의 실존적 유한성에 굴하지 않는 사고의 자유로움을 말하면서, 이 자유로움에 걸맞지 않는 실재론적 보편성의 이념을 옹호한다. 원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적 유한성의 본질이다. 이 사실을 유념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자유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그 자유 자체를 구속한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인 스트레인지에게 자유를 주고, 그 자유를 스스로 구속해야만 차용할 수 있는 힘마저도 모두 제공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고가 실재를 형성하는 존재는 단 한 분, 곧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한 번 정하신 뜻과 언약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걸어놓으신다. 때로는 그가 우주만물의 질서를 초월하는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하지만, 이런 일들은 결코 임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과 생명의 수여를 목적으로 할 때만 발생한다. 영화는 이런 제약과 질서를 벗어나 신적인 힘을 마음껏 사용하려는 욕망을 투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스트레인지가 시간의 운행마저 지배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시간의 역행과 순행을 지배하는 것은 곧 자기의 존재적 가능성을 좌우하는 것으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욕망이다. 영원한 삶에 대한 꿈은 시간의 단선적이고 등속도적인 운행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간과 동행하려 한다. 그러나 스트레인지와 같이 시간의 순행과 역행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과 동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간의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만약 이런 식의 시간 지배가 가능하다면 다중우주도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존재적 가능성을 선택한 뒤, 그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하는 시간의 분기점으로 다시 돌아와 다른 가능성을 담아내고 있는 세계로 진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간의 지배자는 스스로 죽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영원히, 모든 가능성들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곧 뜻하는 대로, 혹은 말하는 대로 현실을 만들어가는 초월적인 존재방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작품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마블과 DC 작품들을 포함한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감정이입의 기법을 통해 상업적 성과를 얻는다. 스스로 영웅이 되고 구원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장 마음에 와 닿게 충족시켜 주는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발전가도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작품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스트레인지라는 캐릭터는 아예 시간의 운행 자체를 지배하는 신적인 힘의 결정판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스트레인지는 이 힘을 얻은 대가로 자기를 수없이 희생하는 무한루프(infinite loop)에 빠져들기도 하나, 결말에서는 초월적인 힘과 그 힘을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유를 모두 거머쥐게 되는 반신적(demi-godly)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는 이처럼 힘과 패권에 도취된 성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로 미뤄보건대 마블 엔터테인먼트(Marvel Entertainment)가 창조한 수많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 중 닥터 스트레인지가 가장 강력하면서도 괴팍하고 반사회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말한 대로 이루리라'는 언어의 초월적 힘을 대가와 제약 없이 쟁취하려는 자기우상화(self-idolization)의 욕망을 화려하게 투사해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인간 관계(Divine-human relationship)의 무게추를 철저히 인간 편으로 옮겨놓는 사고방식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 하나님의 자리는 다중우주로 대체됐으니 범신론적 우주-인간 관계(pantheistic cosmic-human relationship)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오직 하나님만이 다스리실 수 있는 시간적 가능성의 영역을 인간에게 맡기려 하니, 그 상상력의 결실이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같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창 3:6)."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