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정일웅 박사
서언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사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하여 있던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초기에 발표한 교육적인 책과 문서들을 통하여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교육학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단순한 일반교육학자가 아니라, 그의 교육학의 핵심사상은 역시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교육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학문적인 성장배경은 역시, 그가 속했던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할 때,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사상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뜻에서 코메니우스와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다루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먼저는 역시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J.Hus)에 의한 종교개혁운동의 역사를 말하고, 다음으로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의 설립과 교단발전사, 그리고 17세기 유럽과 코메니우스와의 관계를 차례로 다루게 된다. 

1. 요한 후스(.Hus)의 종교개혁과 후스파 운동

요한 후스(J.Hus:1369-1415)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약 100년 전, 보헤미아(체코)의 프라하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신앙의 가르침과 교황제도와 그 제도가 초래하는 문제 등에 대항하여 교회개혁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 후스는 1400년경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자마자, 1402년에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게 되었으며, 곧 이어 프라하 대학에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총장직에 올랐고, 1412년 그곳에서 추방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까펠레(예배당)는 실로 로마가톨릭교회를 향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중심지였다.

후스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영국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 Wyclif: 1320-1384)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위클리프는 기독교신앙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성경뿐임을 확신하고, 일찍이 성경에 근거하여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 1세대의 선구자였다.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가톨릭성직자들의 비윤리성과 성직매매 등을 비판하면서 교회갱신을 부르짖었으나, 후에 그는 구체적인 개혁으로 예배에서 자국어로의 설교와 성찬에서 떡과 잔을 나눌 것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후스는 교황 23세의 십자군 면죄 건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사제직에서 파면 당하였고, 프라하에서 추방당했다. 그런 후에도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도움으로 그는 민중집회를 개최하고 설교를 계속하였으며, 잘못된 비성경적인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집필하였다. 마침내 로마가톨릭의 교황권에 대한 비판으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제소되었고, 거기서 이단자로 정죄되어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하게 된다.      

후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이 분노하게 되었고, 원래 후스가 콘스탄츠공의회에 소환될 때, 그의 신변보호를 약속했던 지그문드(Sigmund:1368-1437)왕이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비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스를 추종하는 여러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보헤미아(체코)전역에서 가톨릭교회를 거부하는 교회개혁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저항운동의 여러 그룹들이 연합하여 소위 '후스운동(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프라하 신앙4개 조항을 만들어 발표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후에 후스파교회의 신앙고백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운동은 3개의 그룹역사로 발전하게 된다. 첫째 그룹은 타보리텐(Taboriten)파로 불리는데, 이들은 타보르(Tabor)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그룹으로 매우 급진적이며,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서는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행동을 취하는 자들이었다. 1452년경, 이 그룹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되었으며, 남은 자들은 후에 새롭게 시작된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에로 흡수되었다. 둘째 그룹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성찬에서 떡만 주고, 잔(포도주)을 주지 않는 일에 항거하여 '양 영성체(Utraquisten)파'로 불리는 그룹으로, 성찬의 떡과 잔은 동시에 분배하기를 주장하는 그룹이다. 이 그룹에 주로 고위 귀족들과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 그리고 도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가톨릭교회의 유인술책에 의하여 끝내 로마가톨릭교회에로 흡수되고 만다. 셋째, 보헤미아형제연합파(Unitas fratrum)인데, 이 그룹은 '양 영성체파'가 가톨릭교회로 흡수되면서 이에 반발한 소수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1450년경에 시작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룹은 사도시대의 초대교회 신앙을 따라 성경의 복음에 합당한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였던 신앙적으로 매우 경건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의 진리에 매우 비타협적인 성격을 보이며, 경건한 신앙과 엄격한 신앙훈육방식 때문에 '양 영성체그룹'의 박해를 받기도 하였는데, 역시 이들은 성경대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는 오히려 다른 후스파추종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후스정신의 계승자들로 평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본지 편집고문인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전 총신대 총장)의 논문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역사적 배경-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생애와 관련하여-'를 저자인 정 박사의 동의를 얻어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