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기독문학세계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그 날 나는 운동 중에 있었는데, 후반 네 번째 홀에서 의 일이니 한여름 낮의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던 시간이었다. 드라이브 티샷을 하고 페어웨이 정중앙을 향해 가볍게 걸어나오는데, 오른쪽 언덕배기 전체가 금속성을 띤 것 같은 어떤 물체들로 뒤덮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깔이 너무나 신기하여 나는 걸음을 멈추었고, 곧바로 그들이 꿩 가족인 것을 알았다. 열두 마리의 어린 꺼벙이들과 어미 꿩 한 마리였다. 어미 꿩은 꼬리 깃은 약간 짧았고 몸길이가 50-60cm 정도의 크기로 황토색 바탕의 깃털에 고동색 얼룩무늬가 선명했다.

꺼벙이들 역시 몸통이 연한 갈색이어서 어미를 둘러싸고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언덕을 덮은 금속성 물질처럼 보였다. 그 위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 어미 꿩, 까투리는 장끼와 함께 골프장 초원의 작은 나무 숲속에 살면서 지천으로 깔린 숱한 지렁이와 작은 곤충들을 잡아먹고는 산란기를 맞았던 것 같다. 이어 까투리는 땅에 얕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위에 장끼가 날라다 둔 풀을 깔고 알을 낳았을 것이다. 어미는 3주동안 알을 품고 있다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열두 마리의 새끼 꿩들을 세상 밖으로 내어놓은 것이었다.

암컷인 까투리는 새끼들 한 가운데 우뚝 서서 고개를 곧추 세우고 반대편 언덕을 주시하면서 흡사 비상을 향한 출발 명령을 내리려는 기세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이들 꿩 가족의 다음 동작을 지켜 보았다.

멀리 날아가지도 못할 것인데 날다가 혹시 페어웨이 중앙에 떨어지는 건 아닐까.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새들처럼 높이 멀리 비상하지 못하는 새(?)이다. 그럼에도 수꿩의 깃은 참으로 우아하다. 새하얀 목 위로 오뚝 솟은 선홍색 볏이 양귀비꽃을 보는 듯하지 않던가.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배웠었나. 모든 조류가 1억 년 전에는 모두 파충류였다고. 그러나 천적에 쫓긴 도마뱀들은 수천 년 간 앞다리를 퍼덕여 나뭇가지에 날아올랐고, 또 다시 오랜 세월 허공으로 솟구쳐 날개를 얻었다.

한데 꿩의 선조는 다른 조류들이 고되게 비상할 때 땅에서 편히 어정대는 길을 택히고 안주하였는가. 하늘로 날 수도 땅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무력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퇴화된 날개를 버리지도 못하고, 또 달고 있으면서도 비상하지 못하는 꿩의 고된 삶..., 안타까운 일이다.

2010년 가을이었다. 나는 헝가리 펜클럽 초청으로 동유럽을 방문하던 중, 여행 끝에 불가리아로, 그곳에서 다시 루마니아로 가게 되었다. 사실 루마니아 여행은 계획에 없었던 것인데, 불가리아인 친구 디미타 씨 때문이었다. 전날 나는 그의 집에 초대되었고, 우리 대화의 중심 부에 20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루마니아의 작가 헤르타 뮐러가 있었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지 불과 1년이 지난 때였고, 마침 동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던 중이었던 고로 나는 헤르타 뮐러를 인상 깊게 두고 있었다. 독일어 문학권에서는 주변부를 차지하는 소수자이고 동구권에서 망명한 작가임에도,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작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게 된 그녀의 삶 자체가 문학적이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지금도 나를 감동시킨다. 작가는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 문학을 담아내는 책애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우리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그거기에 문학은 머릿속에 보관되는 일종의 사유재산 같다. 그리고 책,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책보다 강력하게 영향을 끼칠 순 없다. 반면 그것은 참으로 단순한 물건이기 때문에 오직 생각하고 느낄 것 , 그 외의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바로 이 작가, 헤르타 뮐러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 <인간은 이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