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정일웅 박사

그러면 코메니우스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물론 코메니우스가 신학적인 주제들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밝혀 놓은 현대 조직신학과 같은 내용은 없다. 다만 그의 모든 글들에서 다음의 몇 가지 신학적 주제들에 따라 소개해 본다. 

(1) 코메니우스의 성경관

그는 성경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신학적이며 교육적인 그의 사고는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학이 얼마나 성경에 의존되어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누가 나의 신학에 대하여 질문한다면, 나는 성경을 파악하고, 마음과 입으로 그 성경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한다. 즉 이 성경책에 기록된 것을 나는 믿는다."  이러한 고백대로 코메니우스는 분명히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확고히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즐겨 사용한 성경은 체코어 번역인 '크라리체 성경'(Kralitzer Bibel)이었다. 이 성경은 1620년과 1623년에 완역되어 출판되었고, 1658년에 코메니우스에 의하여 암스테르담에서 형제연합교회가 사용하는 크라리체 성경의 요약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모든 작품 가운데서 수없이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 얼마나 성경 말씀에 의존된 신학자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성경을 적절히 해석하기 위하여 해석학적인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학교에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먼저 책 중의 책인 성경이며, 둘째로 이 책의 해석인데, 한 분 내적인 박사요 모든 진리의 인도자이신 성령이며, 셋째로 계속적인 말로서, 명상, 하나의 정확한 방법이며, 실제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성경 해석의 열쇠를 3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 둘째, 이러한 찾음은 믿음의 빛으로 시도해야 한다는 것, 셋째, 감관세계와 인간의 이성(오성)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암시가 가장 원천적이며 전형적인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믿음에 대해 불합리한 것을 믿는 것(credo quia absurdum)이 아니라, 감관의 경험과 이성적인 사고와 믿음이 온전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 바로 이러한 이해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책들에 관한 코메니우스의 입장이 놓여 있다. 하나님은 다만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 만 아니라(성경책), 창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며(자연의 책), 또한 인간의 정신과 양심 가운데도 계시하셨다(정신의 책)고 하였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 권의 책들에 동일한 것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식은 모든 이 세 가지 책들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루터의 명제였던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루터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성경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얻게 한다. 즉 성경은 책들 중의 책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핵심적인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른 책들, 즉 인간적인 경험과 사유 활동의 주체인 이성과 자연의 경험적 이해와 관련되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성경은 적절하게 이해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성경 안에서 중심적인 것은 덜 중요한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독교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정경 중에 정경'(Kanon im Kanon)을 내세우려고 하였다. 만일 모든 문서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숲이며 여러 가지 피난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공동의 깊은 통찰을 통하여 달리 생각하는 자들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의 핵심을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바로 믿음(Glaube), 사랑(Liebe), 소망(Hoffnung)의 주제였다. 그리고 정경의 핵심은 코메니우스에게서 물론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이며, 그 외에도 그는 구약성경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신학의 근원을 역시 구약과 이스라엘에서 찾아내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예언(Prophetie)과 창조(Schoepfung)는 그의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항상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자연신학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물론 그러한 태도는 그를 자연신학자로 오해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 다만 성경 계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서로의 연관된 의미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코메니우스의 신관

코메니우스는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관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확고히 서 있었다. 그는 당시 소치니안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신관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삼위일체 신관을 고수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속의 주이신 그리스도요, 거룩의 주인이신 성령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확고히 믿었다. 그리고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그 창조세계는 선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창조의 질적인 모습은 일차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지정한 자리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초기의 글 '안전의 중심'(Centrum Securitatis)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나의 그림에다 옮겼다. 즉 그 그림에서 세계는 중심체인 하나님의 주위를 맴도는 바퀴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러한 중심의 주위에 배열되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은 두 가지 중심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이시며, 다른 하나는 모든 피조물 자체로서 하나님이 그에게 적용시킨 방식과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죄의 타락을 통하여 창조의 선한 질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는 인간의 실수를 통하여 창조의 선한 질서가 왜곡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질서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싫어하고, 스스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려는 것이 타락된 모습이다. 인간이 스스로 충고자가 되며, 인도자가 되며, 보호자가 되며, 주인이 되는, 즉 총체적으로는 인간 자신이 신이 되어 있는 모습이 타락이며, 그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며, 자신이 목표가 될 때, 그 결과는 인간에게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첫째, 창조주가 지정한 자리를 떠나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의 일에 대하여 그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며, 삶의 목적과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며, 전 세계는 구르는 위험한 바퀴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 타락의 결과는 범죄자인 인간에게 뿐 아니라, 무죄한 모든 피조물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즉 전 세계가 와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신의론(Theodizee-Fragen)에 관한 물음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선한 창조 가운데서 죄 타락이 가능한가?  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의 악과 고난으로 어떻게 선하시며 전능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특별히 30년 종교전쟁의 시작으로 위기의 시대와 박해의 시대에, 이러한 질문이 코메니우스에게 제기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그의 감동적 위로의 글, '슬픔에 슬픔을'(Trauern ueber Trauern)에서 구약의 욥을 기억하면서 깊은 생각을 묘사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의 고난과 악인의 일시적인 승리에 대한 물음에 해결책으로, 코메니우스는 언제나 성경적인 모범을 빌려 와 대답한다.

먼저 하나님에게서 선한 것이 나온다. 그러나 나쁜 것은 후에 인간이 첨가시키게 된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그러한 상태를 도시의 수도관의 모습을 비유하여 설명한다. 깨끗한 물이 샘(근원)에서 흘러나간다. 그러나 도시로 이끌어가는 배관에서 더러운 물로 바뀌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일은 언제나 인간에게서 일어나며, 인간 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다 해당하는 것이라면(하나님의 공의), 믿는 자는 그 안에서 네 가지 유익을 경험하게 된다. 먼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학교, 즉 특별히 경건한 자를 위한 학교이며, 그리고서 뒤따르는 징계나 예방 차원의 위협(경고)으로서, 곳곳에서, 역시 경건한 자들에 의해서도 발견되는 악은 벌을 통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침내 옛것의 파괴는 전체를 새롭게 하는 일에 기여한다는 입장을 코메니우스는 견지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진노는 다시 그의 은혜로 전환된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뉘우치고 회개할 때만 그렇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욥에게서처럼 미해결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자가 누구랴? 또는 세상은 자신과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차이를 더 분명히 인식하도록 길을 잃게 되는 미로(迷路)가 되었다고 코메니우스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인간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다만 자기중심적 태도와 피조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자비의 깊이에로 자신을 개입시켜야 하며, 그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전창조세계가 무질서에로 빠져들게 된 것처럼, 인간의 올바른 위치에로 되돌아옴을 통하여 세계가 다시 질서 가운데로 옮겨져야 하는 것이다. 사물은 그 본래의 자리를 떠나 있기 때문에 다시 본래의 자리에로 되돌려져야 한다. '본래의 위치에로 되돌린다는 것'(올바른 질서에로의 정리)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것들이 본래 있어야 할 위치에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러한 본래의 위치에로 되돌린다는 것은 원래 모든 것들이 낙원(에덴)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모든 사물이 그 위치에서 그렇게 보이도록 범세계적인 일로 본 것이다. <계속>

*크리스천투데이는 본지 편집고문인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전 총신대 총장)의 논문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저자인 정 박사의 동의를 얻어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