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황혼(黃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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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듯, 인생은 신생아가 노인이 되는 여정이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체가 번식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고, 순리를 형성하신 창조주의 섭리로 자연은 순환한다. 인생 또한 순리의 정중앙에 서 있는 자연이다.

모든 인생들에게도 해질녘 하늘빛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한다. 황혼이다. 청춘들이야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다. 주름진 얼굴, 늘어진 피부, 책임과 의무 속에서 버둥댄 과거의 등짐마저 내려놓지 못한 채, 삶을 위한 삶만을 지탱하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투리 시간이나마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며, 적극적인 참여와 실천으로 자신의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는 황혼들이 늘어나고 있다. 황혼 이혼이 그렇다. 성장한 자식들이 저희의 삶을 찾으면서, 가치관이 다른 상태로 버텨오던 부부의 명분은 당위성을 잃고, 가슴 깊이 감추어둔 인고의 주머니를 열어젖힌 부부들이 이혼을 통해 새로운 가치 실현을 꿈꾼다.

황혼 이혼은 새로운 인생관을 형성시키는 첫 번째 실천 요인으로 결행되고 있다. 고전적 사고를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황혼 이혼은, '한 번뿐인 생의 소중한 가치 실천'을 당위로 하여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다양한 분야의 사회 참여로 기쁨과 보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이 황혼 이혼에서부터 발휘된다는 새로운 가치관 때문이다.

필자 또한 이미 황혼 대열에 합류해, 날마다 물결 따라 흐르는 세월이 되었다. 언제부터 해질녘 하늘색에 매료되기 시작했는지 기억은 없다. 그저 귀밑머리가 희어지면서부터인가 싶다. 일상생활 속에서 건망증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부터, 신호등의 초록불이 꺼지지 않았어도 달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부터 ,쉼을 찾고자 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서해 끄트머리를 향한다.

30대, 40대, 50대도 인생 여정 중 노인이 되어가는 시간 안의 쇠퇴기이지만, 아직 패기와 성취를 위한 열정,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환경으로 인하여 늙어간다는 시름을 느낄 시간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60대가 되면, 돌아보니 참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잔뜩 짊어지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과, 초로의 회환 앞에 만져지는 씁쓸한 자화상을 인정해야 한다. 백 세 시대가 되었다고 노년을 보내는 이들의 열정과 지혜가 거침없이 발휘되고 있지만, 성경은 강건해야 팔십이라고 인생의 여정을 함축하고 있다.

노인.

서글픈 마음을 삭히기에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범사에 여유가 생겼다고 자위하고 싶다. 극한 대립을 피하고, 울분을 삭이는 자제력과, 갈등과 반목 앞에서 그저 허허실실 쓴웃음으로 가리고 마는 움츠림은 곧 여유로움이다.

그러나 분명한 현실은 나약함과 느림이다. 노인은 모든 사고와 행동이 느리다. 걸음걸이가 느리고, 분별이 현명하지 못하고, 이해력이 턱없이 부족하며, 진취적인 기상은 먼 옛날 이야기이다. 성경은 노인을 서운하게 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다.

인생은 누구나 노인이 되기 위한 학습의 시간을 걷고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른 세월 속에서, 노후를 준비하는 것 또한 삶의 일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삶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긴 죽음의 시간이다.

황혼의 아름다움은 성취하고 싶은 것을 위해 경험하고 도전하는 행동적 실천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준비를 해 놓고 그윽한 소멸을 꿈꿀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이다.

석양, 노을, 낙조, 황혼은 늙음과 결말이 아니고 새로운 도약의 초석이다. 황혼뿐 아니라 죽음을 지닌 모든 인생들은 죽음을 위한 준비 안에서 자유롭다. 죽음을 위한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영생 한 가지뿐이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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