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대담]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3·최종

크리스천투데이는 새해를 맞아 한국교회의 대표적 강해설교가인 박영선 목사(남포교회)를 만나 신년 대담을 진행했고, 이를 총 3회에 걸쳐 게재한다. 다음은 박 목사와의 일문일답.

[대담=류재광 편집국장, 정리=이대웅 기자, 사진=김진영 기자]

박영선
▲박영선 목사.

보수주의는 무대, 자유주의는 무용수… 싸울 대상 아냐

-목사님께서는 "'철자 받아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만들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단어는 그물코와 같은 것입니다. 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면 그물이 됩니다. 그래야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사상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맞춤법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나 현대화가 아직 여기까지밖에 안 온 것이 아닐까, 서로 '맞다 틀리다'의 싸움을 하는 이유가 다른 생각과 목적지를 가져서가 아니라, 그물을 만들지 못해서 잘하려고 하는데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자리까지 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보수주의는 매우 명예롭고 특별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개혁주의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도 말씀해 주십시오.

"보수주의에는 단순하고 분명해야 하는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무대와 같습니다. 무대는 단단해야죠. 이렇게 분류하면 오해의 소지도 있지만, 자유주의는 좀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대 위의 무용수와 같지요. 무대와 무용수는 서로 싸울 대상이 아닙니다. 무대 보고 춤을 추라고 하지 마시고, 단단해지고 더욱 넓어지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무용수는 무대 위로 와서 춤을 추고 예술을 만들어 주십시오.

개혁주의는 어제 승리했다고 해서 오늘도 기계적으로 그 승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 이긴 싸움을 오늘 다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이기고 제도를 만들고 선언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자동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다른 주의에도 다 장점이 있으니 각각의 장점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 빚을 나누어 져서 덕을 봐야 하는데, 자신이 가진 장점의 적극적 가치를 모르면 배타적 비난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하게 됩니다. 거기까지는 서로 가지 않아야 합니다.

강요나 선언, 멋있어 보이지만 스스로 속임수 빠지는 것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는 '맞다 틀리다'를 최우선 목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주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끌어안는 것이 최우선이고, 옳고 그른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의 산물이 아니고,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은 기적의 산물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그것을 기억하고 옳은 길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지, 주님 오시기 전에 잣대를 대고 선을 긋는 것을 금물입니다.

이 문제를 이 깊이에서 이해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정죄하고 선을 긋는 게 멋있고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일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의 대표적 두 인물인 모세와 바울을 보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는 것도 감수하려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맨 첫 번째 조건은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사람 편을 드시고 죽으셨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정신을 잃으면 결국에는 강요하게 됩니다. 복음은 강요되면 힘을 잃습니다.

복음은 무한한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증언하라고 우리 인생 속에 온갖 기회를 주십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죽여 버린다'고 하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도 눈물도 탄식도 주십니다. 그것까지 해 보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매뉴얼이나 조작법이나 강요할 수 있는 큰 소리가 되고 싶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면 절대로 안 됩니다. 신앙은 한 인생의 한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 물어야 하고 울어야 하고 무릎 꿇어야 하는 것이지, 어디 나가서 멋있는 소리 하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칫 총회석상에서 '우리는 절대 용납 못 해' 하면서 쉽게 끝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박영선
▲박영선 목사는 “개혁주의는 은혜와 능력을 나눌 때 은혜를 아주 분명하게 붙잡는 것”이라고 했다.

단단한 것은 은혜… 이 시대의 문화와 단어로 표현해야

-"개혁주의는 단순하고 분명하며 단단해야 한다"는 말씀과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이 아닌,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은 기적의 산물"이라는 말씀은 언뜻 모순돼 보이기도 하는데요.

"단단한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와 능력을 나눌 때 은혜를 아주 분명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흔히 '단단하다'고 하면 금방 경직된 것을 떠올리는데, 보수주의자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물질이 풍요한 나라이기에, 그곳에 가 보면 자본주의의 거대한 모습과 넘치는 소비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이라도 시골로 들어가 보면 옛날 청교도처럼 사는 소시민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정직하고 근면하고 남을 헌신적으로 돕습니다. 원래 미국은 그 조상이 청교도이고 그런 유산을 받은 나라인데도 더 큰 도전, 더 복잡해진 사회, 더 교묘해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계속 단순한 답만 내놓는 바람에 소위 '무식한 꼴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을, 이 시대의 문화와 단어들로 다시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이 시대 우리의 책임입니다. 제 설교에는 그런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쓰는 단어와 보는 영화를 제가 잘 모르게 됐습니다. 그러니 은퇴할 때가 된 것이지요(웃음).

‘하나님 은혜’, 문제 해결 넘어선 ‘새로워진 안목’에 있다

-인상 깊게 읽으신 책, 추천할 만한 책이 있으시다면.

"동일한 책에서도 사람마다 영향을 받는 부분이 다르고, 저자가 의도하는 것과 독자가 감명을 받는 것이 꼭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책에는 좋은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기억나는 것은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불행을 주시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는데 굉장히 공감이 됩니다. 저자는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부인과 아이를 잃고, 남은 자녀들을 홀로 키우면서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왜 이유 없는 비극이 오는가', '하나님께서는 대체 뭘 하고 계시며 무엇을 원하시는가' 질문합니다. 그럴 때 주위에서 위로라고 해 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가장 와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20년 뒤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썼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보니 20년 전의 말할 수 없이 비극적이었던 그 사건이 다만 소품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고로 깨우쳐 주시고 담아 주신 것들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슬픔을 이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재혼하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손주까지 봤는데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결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깊은 공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새로워진 안목에 있습니다.

산을 올라가다 보면 산이 아닌 숲길만 계속 보입니다.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시야가 트인 언덕에 서면 경관이 달라집니다. 시야의 높이가 달라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올라가다 보면, 아까와 같은 것이 보이는데 무언가 다릅니다.

제가 예전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누군가 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질문이 제게 중요하지 않게 됐는데, 그것은 이제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안목이 더 생겼기 때문입니다. 관용과 인내라는 면에서 분명한 진보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 인생은 그냥 흘러가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말 중에 어느 하나씩 도움을 받아서, 자기 삶에서 희망을 갖고 견뎌 보겠다고 다짐하는 일이 생기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는 한국교회에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근년 들어 우리의 한계를 실컷 보았으니, 이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보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