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방금 읽은 에베소서 4장은 지난번에 본 고린도전서 12장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바울이 고린도교회 앞에 쓴 편지에서나 여기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에서나 교회에 관하여 말할 때는 거의 비슷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사도가 교회에 관하여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잘 깨달으면 오늘 우리도 주님의 교회를 잘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한 동안 그리스도의 몸을 이 땅에서 이루고 사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살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성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신 교회

1절을 보지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는 앞에서 말한 것을 놓고 "그러므로" 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한 것을 다 볼 수는 없고, 중요한 한두 구절을 보면 먼저 1:4을 보지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이 말은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이라는 말인데, '주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했지요? 여기 '우리'는 바울을 위시한 에베소교회, 또 주님의 참 백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벌써 택하신 공동체가 이미 있습니다. 이것을 본문 12절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는 이미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교회, 본체의 교회는 이미 존재하지요? 본체의 교회가 있는데 이 지상 위에 나타난 것이 에베소교회, 오늘 하나로교회입니다. 때가 되어 지금 우리도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진짜 주님의 교회라면 주님께서 택하셨는데, 역사 위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데, 3:6을 보지요.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그리스도께 결합된 몸, 교회는 그리스도께 결합했으니까 '그분과 함께 상속자'가 됩니다. 상속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께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상속자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인데 이 교회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결합되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뵙고 예배할 수 있지요? 또한 삶을 살다가 죽으면 아버지의 세계, 영원한 세계도 갈 수 있지요? 그리스도께 결합되었으니까 죽어도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지요? 정말 주님의 몸에 연합된 교회라면 죽음 저 너머의 세계도 보장이 되고 한 개인도 참된 교회에 연합하여 살면 죽음 저 너머의 세계도 보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참 교회에 연합한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지요? 이 땅에서 우리의 구원이 결정이 납니다. 참 교회에 속함으로 구원을 보증 받고 계속 보호를 받으며 마땅히 할 일을 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연의 사명

이렇게 본체의 교회에 속한 택정함을 입은 교회가 이 땅에 나타날 때 무엇 때문에 나타나도록 하셨는가? 예수 믿으면 바로 천당으로 데려가지 않고 다 그리스도께 연합한 교회에 속하게 하셨는데, 왜 이 교회에 속하여 살도록 하셨는가? 교회를 이 땅위에 왜 세우셨느냐는 거지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가지요. 1절에 "그러므로...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지요?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금 교회가 참 교회이면 이것은 주님의 교회이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 여기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인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 내려놓고 성부께 복종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그런 겸손이 바로 온유입니다. 교회를 이곳에 나타내 보이셨는데, 이 교회를 위하여 겸손하고 온유하라, 자기 전부를 다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을 순종하라, 합니다. 또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리스도께 결합된 이 결합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데, 이 결합체를 끊지 말라는 거지요? 그리스도께 결속시켜 주신 것을 끊지 말라, 그리스도께 결속한 이 일에 여지를 두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왜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습니까? 예수 믿고 천당! 하면 끝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 결합되었을지라도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완전하게 성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본성은 끊임없이 반대로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만 받으면 끝나는 게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교회답게 할 사명 때문입니다.

뒤에도 생각할 텐데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말로 '교회', 중국 사람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엇을 가르치니까 가르칠 '교'자를 써서 '교회'라고 번역했는데, 본래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불러 모았다'는 뜻입니다. '회중'이란 말인데, 세상에 있는 자를 '불러 모았다'는 말이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초기 당시 에베소 지역에 자기 백성을 불러 모은 것이 에베소교회이고 오늘 분당 지역에 주님 자기 백성을 불러 모은 것이 하나로교입니다. 하나로교회다, 에베소교회다, 이 '교회'라는 말을 쓰는 것은 본체의 교회에 연합시켰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연합하고 있어도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지체'라거나 '분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교회'라는 말을 쓰는 것은 본체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체에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또 어느 사이비도 '교회'라는 말을 쓰니까 참 문제이기는 한데, 주님께 결합된 공동체라 하면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교회가 당면한 사명이 무엇이냐? 왜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여 교회라는 말을 쓰도록 하셨고, 이렇게 교회를 이 땅에 출현시켰느냐? 3절에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지키는 것이 본연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본연의 사명이 무엇이냐?' '우리의 본연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 결합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업적을 내고 할 것이 아니고 먼저 그리스도께 연합한 이 몸을 그리스도의 몸답게 지식도 마음도 의지도 잘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할 일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한 이 결합을 끊으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께 연합된 교회의 본연의 사명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적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본연의 사명인 동시에 시대적인 사명이기도 합니다.

○장성의 필요성과 자양은?

우리가 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는 것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고, 또 우리 안에도 아직 아담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휘하에 있고 마귀는 자기 졸병들을 거느리고 끊임없이 주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올무를 놓아서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 안에 육신도 있고 또 그 놈의 마귀는 우리 육신과 연합을 꾀하여 우리의 하나 됨을 자꾸 흩으러 놓습니다. 여러 사람을 이용하고 환경과 상황을 사용하여 결속력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일을 자꾸 만들어서 하나 됨을 깨뜨립니다. 갑자기 무슨 일을 발생시켜서 결속력을 깨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잃어서 결속력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수고와 힘이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 됨을 지킬 수 있는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로 결합시켜 주셨다는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 결합시켜 주셨으니까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체이지요? '생명'은 특징이 뭐라고 했지요? 활동한다는 것과 자란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활동을 하고 자랍니다. 이 생명이 활동을 하려면 첫째, 그날 에너지가 필요하지요? 그날 양식이 없이 활동할 수 없듯이 우리는 늘 신령한 양식을 공급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불러 모으시는 교회로 연합하여 공적으로 말씀하시는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에 사심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생각을 분산시켜도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듣는 일에 분열을 가져와서는 곤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지요? 사도가 찾아와서 말을 전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말합니다. 사도행전 17:11에는 '베뢰아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하고 이유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가 곧 '신사적'인 것이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곧 신사적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을 늘 공급받을 때 그리스도의 지체로 활동이 가능합니다. 또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 됨을 힘써 지키려면 첫째,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면서 활동해야 하고 활동하면 성장합니다. 생명체가 활동하지 못하면 죽은 거지요? 자랄 수 없지요? 자라지 못하면 점점 쇠퇴하여 죽어가는 것처럼 교회는 가만히 있으면 타락합니다. 마귀의 전략 중 하나는 가만히 있도록 합니다. '그래 네가 하는 것, 그 생활을 계속 유지해서 가만히 있어라!' 이게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세상 단체처럼 정체되어 있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자꾸 활동하고 자라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전서 2:2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여기 '신령한 젖'이란 우리가 잘 알 듯이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자양인데 곧 '말씀'이라고 했지요? 또 여기 "구원"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거듭났다'는 그 말이 아니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서 완결되는 구원을 말합니다. 영광의 나라에 들어간 완결된 구원을 이루도록 자라게 하는 자양이 신령한 젖, 말씀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18에 주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하는데, 말씀으로 낳아놓고 그만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생명이든지 태어나면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되면 끝이라는 이 천한 구원론이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태어나면 하나님께서 불러 모아 계속하여 말씀인 신령한 젖을 공급합니다. 병들지 않고 성숙하도록, 굶주리지 않고 메말라 죽지 않도록 주님께서 말씀을 늘 공급해 주셔서 완전한 구원에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신령한 젖', 주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양을 <계속하여> 공급받아야 점점 인식이 서고 무엇을 알아서 하게 됩니다.

○은사와 직분, 주신 목적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굶주리게 되지요? 영양공급을 섭취하지 않으면 굶주려 메마른 것같이 되는 그와 똑같습니다. 교회는 말씀이 풍성하지 않으면 굶주려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굶주리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활동하고 그리스도의 몸, 하늘에 계신 그 그리스도의 몸처럼 장성하도록 주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활동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합니다. 하나 됨을 위하여 주님께서 교회에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각양 은사와 직분입니다. 뒤에 11절부터는 교회에 대표되는 직분을 죽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시는데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다고 하지요? 지난번 우리가 배웠지요? 성령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다하고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은사와 직분을 주신다고 하는데, 교회가 그리스도께 붙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자양을 공급받아서 활동하고 또한 성장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와 직분을 교회에 선물로 주십니다.

8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을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다'고 하지요? 여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하는데, 이것은 시편 68:18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죽음을 패배시킨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대적한 자, 죽음의 권세들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정복했지요? 대적자를 다 정복한 후에 하나님 보좌에 오르셨습니다.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교회에 은사와 직분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와 직분은 그리스도의 선물 혹은 삼위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은사, 선물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답게 활동하고 자라게 하기 위함입니다. 11절부터 나오는 교회의 직분자도 다 그리스도의 몸을 몸답게 활동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을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혹은 무슨 별도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처럼 활동하고 그리스도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별도로 무슨 프로그램을 가지고 혹은 기도를 많이 한다든가, 찬송을 자꾸 반복 불러서 무슨 황홀경이나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 또 무슨 비상한 방법은 정상적인 활동과 성숙의 길이 아닙니다.

12절부터 읽어보지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직분을 주셨는데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 결합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각양 은사와 직분을 주십니다. 은사와 직분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다, 교회니까 더 이상 필요 없다', 할 만큼 그리스도의 몸다운 교회가 될 수 없으니까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같은 사람, 죄인들이 교회를 이루었다면 당시에 바리새인보다도 훨씬 못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은사와 직분을 주셔서 말씀의 양식을 공급하고 지체들 상호간에 주고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설하여 나가게 하십니다.

○하나 됨의 내용과 목표

13절을 같이 읽지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교회가 무엇으로 하나 되는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 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로 붙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 될 수 있고, 그분을 알아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지요? 하나가 됩니다. 세례를 합당하게 주고받으면 그리스도에게 결속해서 하나를 이룹니다. 거기서부터 믿음이 점점 자라지요? 또 그리스도께서 양식을 공급해 주시니까 그분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됩니다. 알아가는 만큼 더욱 신뢰하게 되지요? 그리스도를 믿고 알고, 알고 믿는 이것이 점점 더하여 감으로써 하나 됨을 더욱 나타냅니다.

여기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보다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가? 네가 믿고 있는 것,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는 것과 연결이 되는데, 그리스도를 중심한 모든 지식을 믿는 것과, 그러니까 믿음과 지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회중이 그리스도를 믿는 내용을 아는 것에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목사라는 직분자에게 부여된 과제인데요,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도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목사 자신은 점점 진보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내용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한 말은 문자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몇 사람이 교회를 이루든지 그리스도의 한 사람처럼 다 지체로 그리스도께 결속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 그리스도의 한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까지 성숙해져 가는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지식이 나날이 더하여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이 필요하고 또한 그분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데로 자꾸 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잘 알면 알수록 그분의 사랑을 힘입어 그분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 이것은 그분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그분과 결합한다는 것도 그분을 아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그리스도를 폭넓게 알고 갈 때 교회가 더욱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의 지식처럼 지식이 늘어나고 그분의 품성처럼 큰 사랑과 정서를 갖는, 이것이 교회가 도달할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지식부터 자라야 하지요? 무엇을 자꾸 아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변화되고 움직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죽기까지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그처럼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죽는 데까지 복종하는 성숙함이 있어야 하지요? 이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주가 되고 다스리고 권력을 행세하고 하는 것이 성숙한 것이라고 합니다. 많이 배워서 권력을 누리고 물질을 많이 거두어서 행세하고 유력한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주 높은데 이르는 것을 성숙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그리스도처럼 주님을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성숙입니다. 전에는 자기 힘으로 이것저것을 다 하고 아주 높은 자리에서 살았는데, 점점 낮추어서 단정히 주님께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성숙의 길입니다. 아이들도 점점 더 나은 예배를 드리면서 자라가는 거지요?

예배를 예배답게 단정하게 잘 드리려면 깨닫는 일에 점점 더 나아지게 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예배를 단정하게 드리려면 깨닫는 일에 집중해야 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 때부터 예배를 잘 드리는 습관이 필요하고 점점 말씀의 양식을 공급받아서 자라면 주님의 뜻을 잘 알아서 단정히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모르고 뭘 자꾸 하면 미신같이 됩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배우면서도 아주 열심히 깨닫는 바가 그것이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자꾸 알아가지 아니한 신앙생활을 할 때 아주 미신 같은 예배를 드리고 우상을 섬기는 데 빠졌지요? 하나님을 버려버리고 우상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었지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는데 미신같이 섬기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양식을 공급하고 공급받는 것을 제일 우선으로 하고 가야지 그렇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주변적인 것을 자꾸 쏟고 가면, 무슨 일을 시키고 충성봉사라는 명분으로 자꾸 일거리를 만들고 가면 교회는 못 자랍니다. 기형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설교부터 주님의 뜻을 바로 알려야 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풍성하게 알고가면 교회는 물론이고 파급해서 우리 가정도 잘 이룰 수 있고 직업 활동도 더 잘하게 됩니다. 주님에게 결합한 우리 지체들의 연합체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생동감 있게 활동하고 성숙해가지 아니하면 우리 가정이나 직업 활동에서 파급해서 생명력 있게 활동하고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해야 하는 까닭?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을 목표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처럼 성장해야 하는 목표를 두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성숙해야 하는 까닭은? 14절에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알아야 그리스도처럼 품성 발휘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집니다. 여기 "궤술"(퀴베이아)은 문자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다'는 뜻인데요, 주사위로 놀이를 할 때 정직하게 하지 않고 속이거나 사기를 치지 않습니까. 궤술이란 그런 뜻을 가리킵니다. 속이거나 사기를 치면 넘어집니다. 궤술이 그겁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간사한 유혹에 빠집니다. '꼭 그렇게 믿어야 하나? 지름길도 있는데 무슨 그런 힘을 쓰고 말씀을 탐구하고 하느냐?' 하고 유혹하거나, 혹은 좋은 것을 살짝 덧입히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이런 일은 오늘 우리 교회들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별 재미가 없으니까 무슨 주변적인 것을 덧붙여서 설교부터 그렇게 합니다. 교회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예배의 제도 문제라든지 찬송, 기도, 헌금,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꾸 덕지덕지 붙여서 행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설교 안에도 있고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장해야 할 이유가 이런 데 있습니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미숙아의 특징이 뭡니까? 미숙아의 특징이 무엇이지요? 요동하는 거지요? 옆에서 살짝만 누가 이야기하면 금방 넘어갑니다. 엄마 아빠 앞에 있어도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하면 따라가지요? 이게 미숙아의 특징이지요? 어른도 똑같습니다.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앞전에 세월호 침몰 현실을 보았지요? 그처럼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약하면 혹은 편협 되어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하면 금방 동요가 됩니다. 누가 어떤 그럴듯한 말을 하거나 훌륭하다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금방 그쪽으로 요동칩니다. 어떤 이가 친밀하게 다가와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따뜻하게 사탕발림의 말을 건네면 금방 넘어집니다. 사람이 성숙하지 못하면 이렇게 저렇게 쏠리고 요동칩니다. 우리가 성숙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를 분별하여 진리에 굳게 딱 서려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들어와야 합니다. 사실 풍부하게 들어와야 한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기는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딱 붙어 있으면 그분이 가르친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까? 어리다고 그분 가르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아주 적을지라도 그 말씀에 비추어서 조금만 생각하면 분별이 가능한 것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생각하고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것인데도 그냥 묵인하고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리면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교훈의 풍조"란 앞 절의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는 것"에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딱 붙어 있으면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알아가는 일에 여지를 두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이렇게 거짓 가르침의 사기나 교활한 유혹을 뿌리치려면 성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목표를 두고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권면합니다.

○교회를 장성하게 하는 방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이 교회를 지켜가는 것이고 이것이 사명입니다. 자라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숙하려면 첫째, 그리스도의 자양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이 문제만 생각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 되는 것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연합한 분자들이지요? 분자입니다. 개인이 잘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주의가 우리나라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답게 못되도록 딱 가로막고 있습니다.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분자 의식을 가지고 자양을 공급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 일에 우리 모두가 활동해야 합니다. 본문 16절 다같이 읽지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에게서"란 "그리스도에게서"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서로 연락하고 상합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서로 연락하고 상합합니다. 지체가 다 자기 구실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지체들이 다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자기 구실을 다하는 것 아닙니까? 설교를 각인들이 다 깨닫는 것이 자기 구실을 다하는 것이고 둘째, 그 깨달음을 연결된 지체들에게 영양을 주고받듯이 주고받아서 자랍니다. 나만 잘 깨달아 가면 된다, 그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자기가 잘 서 나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도 못 서면서 남을 평가하고 비판하면 안 되지요? 첫째, 자기 구실을 잘해야 하고 둘째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연합해 있는 지체들을 돌아보면서 자양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체인 모두가 활동해야 하지요? 생명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연결되어 있는 지체라면 이 생명의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체인 교회가 성숙해 가는 일에 모두가 다 동심협력하여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것이 사랑으로 완성해 갑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인데, 이것이 상호 교류가 되어서 자꾸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자꾸 활동을 통해서 향상시켜 가야 합니다. 나 자신이 똑바로 서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으면, 그것이 활동으로 나타내면 서로가 공급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가운데서 성장합니다.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처럼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면 각 장기나 각 지체들이 각각 활동하여 영양을 주고받는 것처럼 교회가 그렇습니다. 어느 지체든지 다 몸에 유익을 위하여 각각 활동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그것이 장기로 들어가고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면 영양분이 지체의 구석구석이 다 공급이 됩니다. 공급될 때 입만 활동하고 마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지체가 다 활동하여 영양소가 안 가는 데가 없이 다 공급이 되어 몸이 전체가 자랍니다. 그렇게 몸 전체가 활동하고 성장하는 일에 어떤 지체든지 요긴하고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활동하고 서로서로 영양을 주고받으면서 몸이 자랍니다(고전 12:2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 가려면 첫째, 그리스도의 자양을 공급받아서 자신을 돌이키고 자신을 단정하게 가꾸어서 주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가야 합니다. 둘째, 그런 사실을 옆에 있는 지체들에게도 영향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역량 것 활동하는 것이 있어서 서로 주고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갑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그리스도께 저희를 연결하여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살도록 하심으로 저희가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성숙해갈 수 있게 하시옵나이다. 이렇게 성숙해 감으로써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에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심으로 과연 그리스도의 몸답게 하나님의 품성이 충만히 차게 하시옵나이다. 이를 목표하고 저희 교회에서 은사와 직분을 허락하여 주시고 교회를 건설해 갈 수 있도록 하심으로 저희가 이 땅위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다 할 수 있게 하시오니 주님, 첫째, 저희에게 진리의 말씀을 더욱 명료하게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는 만큼 주님의 뜻을 다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한 저희도 영광이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