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석 선교사.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종교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다. 역사의 여명(黎明)기에 칼빈은 가톨릭 사제, 법률가, 기독교 인문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 그는 오직 성경만을 유일한 텍스트로 삼아 그것의 교사(doctor), 해석자(interpres), 수호자(custos)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살았다. 그의 위대한 저서는 그의 나이 27세 때 라틴어로 출판한 기독교강요다. 그리고 그가 쓴 주석은 많은 주석들 가운데 이정표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젊은 칼빈은 기독교 신학의 정수가 되는 교리들을 정리하고 심오하게 제시함으로써, 교리사상 개혁신학이라는 큰 일가(一家)의 초석을 놓는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430)에게서 물려받은, 절대 주권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윌리엄 캐리와 같은 개척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백스터, 존 버니언,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즈 찰스 스펄전, 그리고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부흥 목회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교회의 목회와 정부 통제에서의 적절한 자유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장로교 설립을 낳았으며, 거기에서 생겨난 민주주의는 세속정치의 기초가 됐다. 1536년에 제네바에 정착한 칼빈은 영국, 프랑스, 스코틀랜드, 저개발국가들,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개혁자들에게 조언하고 격려하는 인물이 됐다. 1559년 이후에 기독교 대학으로 장식된 제네바 자체는, 수천 명의 학생들과 난민들에게 하나님의 피난처이자 영감이었다. 칼빈주의는 초기 미국을 형성하였고, 서구 기독교는 칼빈주의에 대한 지식 없이는 거의 이해될 수 없다.

1. 칼빈 시대의 이슬람

▲존 칼빈.

오스만 터키 군대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에 유럽을 공격했다. 1500년에는 알바니아(Albania)를, 1512년에는 몰다비아(Moldavia)를 점령했는데, 그 사이인 1509년에 칼빈이 태어났다. 당시 유럽의 4분의 1은 이슬람에 의해 정복당했고, 칼빈이 태어난 이후에도 이슬람은 계속 유럽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1517년에는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복속시켰는데, 이때가 루터(당시 34세)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때이자 1509년생인 칼빈이 불과 8세의 소년일 때였다. 슐레이만 2세(Suleiman II)는 4년 뒤인 1521년 여름에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the capital city of Serbia)를, 1527년에 보스니아를 함락시켰다. 무슬림들은 신속하게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 심지어 리투아니아를 향하여 나아갔는데, 1526년 헝가리의 왕 루이 2세(King Louis II)는 자신의 군대가 다뉴브의 모학(Mohacs)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에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는 드디어 오토만의 군대가 비엔나(Vienna)를 포위하게 됐다. 그 무렵 칼빈은 보르게스대학교에서 학위(B.A.)를 받았고, 회심한 후에 개신교도가 됐다. 루터가 죽던 1546년에는 몰다비아의 전부가 터키에 의하여 지배당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의 나이는 37세였다. 루터가 쓴 「터키에 대항한 전쟁에 대하여」와 「터키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가 1529년 작품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슬람은 루터에게 심각한 도전이 됐다. 그러나 칼빈은 이슬람에 대하여 책을 쓰거나 집중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슬람 세력이 물밀듯 밀려오던 시기의 루터와, 이슬람 군대가 비엔나를 정복하지 못한 채 물러가고 나서 이슬람의 공격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의 칼빈에게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루터는 이슬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독일에서, 칼빈은 이슬람의 세력에게서는 안정적인 제네바에서 사역했기에 그 사이에는 이슬람에 대한 긴장감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이슬람에 대해서 견해를 드러냈다. “터키(이슬람)”라는 단어는 기독교강요에 한 번 나오지만, 이슬람의 교리에 대한 태도는 그의 주석서들, 설교들, 그리고 강의들 속에 방대하게 흩어져 있다.

2. 이슬람에 대한 존 칼빈(J. Calvin, 1509-64)의 견해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엄격함이다. 칼빈은 다섯 가지로 이슬람에 대한 견해를 정리했다. 다음 내용은 조직신학자 김성봉 박사의 논문 “이슬람에 대한 칼뱅의 견해”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였다.

첫째, 무함마드는 거짓 선지자 

칼빈은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신명기 13장 1절 이하에 관한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을 [삼위]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는 자들이 반대하는데, 그들은 바로 무슬림들,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다”며, “그들은 신성모독을 하였으며, 교회에게서 마치 썩은 가지처럼 철저히 단절되었으며,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저항하거나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이슬람은 비록 그들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톨릭과 함께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2절에 나온 당대의 배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무함마드는 배교자가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배신하였고, 이 배신은 더 확대되었다”고 하였다. 칼빈이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살면서 실제로 에비온파(Ebionite)의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Khadija)가 에비온파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함마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이븐 와라카 나우팔(Ibn Waraqua Naufal)은 메카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에비온파의 사제였다. 에비온파는 A.D.70년 로마의 티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만들어진 종파로서, 기독교이면서도 유대교의 강조점을 보존하였다. 당시에는 메카에 300-400명의 에비온파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에비온파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기에, 칼빈은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이단

칼빈은 이슬람을 이단이라고 단정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에 대하여 처음 연구했던 사람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요하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 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 , 602-680) 아래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하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 수도사에게서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을 시작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알라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칼빈은 요하네스의 뒤를 이어서 이슬람의 이단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550년에 집필한 주석 중 요한일서 4장 2절과 3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6절을 주해하면서 거짓 선지자의 거짓 예언을 잘 분별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셋째,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우상숭배자들

이슬람은 이단 가운데 어떤 이단일까? 이슬람은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데, 이슬람은 이 믿음을 저버렸다”고 비판한다. “무슬림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우상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고 했다. 칼빈은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또한 하나님이 없으되”(요일 2:23)라고 한 말씀을 언급한다. 또한 요한일서 2장 18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적그리스도 왕국의 전령사’들로 여러 이단들을 언급하면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대신에 일신론적인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넷째, 이슬람은 적그리스도

칼빈에 의하면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이다. 1556, 7년에 낸 신명기에 관한 설교(18:15; 33:2)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함마드는 그의 「알 코란」(Al Coran)이, 교황은 그의 칙령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두 뿔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니엘의 예언들을 전적으로 역사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 즉 안티오커스 IV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및 고대 로마와 연관시키는 것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한다. 칼빈은 교황을 서방의 적그리스도, 이슬람을 동방의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이 둘을 ‘두 뿔’로 언급했다. 칼빈에 의하면, 이슬람을 만든 무함마드는 적그리스도다. 

다섯째, 무슬림에 대한 선교와 개종 가능성

칼빈은 이슬람을 교리적인 차원에서 예리하게 비판했지만, 무슬림들이 도덕적으로 질이 낮다고 보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이슬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소재는 교리였지, 윤리적·도덕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슬람을 추종하는 무슬림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버림받은 자들인가” 하는 선교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은 무슬림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칼빈은 무슬림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복음화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많은 무슬림들을 신·구약성경의 참되신 삼위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정확히 예정하셨다고 믿었다. 칼빈은 신명기 23장 7절에 관한 그의 설교에서 “개종이 가능하고 세례받는 것이 가능한 무슬림들은, 이집트인보다 더 나았고 지금도 더 낫다(창 41:1~출 1:7).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많은 무슬림들을 성경의 삼위 하나님께로 돌이키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이 이사야 19장 21-25절의 설교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의 무슬림들과 이스라엘의 유대주의자들과 이라크와 이란의 이슬람 민족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고 그의 교회에 가담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영광스러운 날이 오고 있도다!”라고 했다.

3.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선교적 적용

칼빈은 무슬림들이 삼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서구 기독교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고,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었다.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서구는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 원수관계로 인하여 이슬람 선교를 외면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하게 됐다.

앞으로 이슬람 선교는 더 많은 희생과 순교를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은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성장한다”고 했다. 이미 그런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 들어온 약 14만 명의 외국인 무슬림들과 9만 천 명의 한국인 무슬림들이 한국 안에서 또 다른 미전도종족으로 소리 없이 성장해가고 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이 쓰임받기를 원한다.

유해석 선교사는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에서 공부했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해 이집트에서 사역했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