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10월의 들판은 풍요로움과 넉넉함 그 자체다. 옛날 손편지를 쓸 때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황금 물결치는 들판…’ 등으로 서두를 장식하곤 하였다. 올해에는 어려운 태풍도 없었기에 더욱 풍년 농사를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겸손의 미덕도 배워야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쭉정이가 고개를 든다, 가랑잎이 더 시끄럽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등의 속담들은, 내실 있고 실력을 감추며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일찍이 강태공도 “자신을 귀하게 여겨 남을 천대하지 말고, 스스로 크다고 해서 남의 작은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또 자신의 용맹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욥 22:29) 했고, 다윗도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라”(시 22:26),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는 말도 있다.

겸손에 관한 실화 한 토막을 보자. 조선 영조 때 경기도 장단의 오목이라는 동네에 이종성이라는 은퇴한 정승이 살고 있었다. 동네 이름을 따 “오목 이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매일 강가에 나가 낚시를 하면서 노후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가 어린 하인을 데리고 낚시를 하다 시장기를 느껴 근처 주막에 방을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고을 신관 사또의 행차가 그 주막에 몰려왔다. 주막에 방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또는 부득불 오목 이 정승이 식사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신관 사또가 거만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아랫목에 앉다 보니 문득 방구석에서 식사하는 촌로(村老)와 어린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주한 밥상을 보니 사또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밥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사또가 물었다. “여보게 늙은이, 지금 자네가 먹는 밥은 대체 뭔가?” “보리밥이오.” “어디 나도 한번 먹어볼 수 있겠나?” “그러시지요.” 이렇게 해서 노인이 내민 보리밥 한 숟가락을 먹어본 사또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뱉어내더니 소리쳤다.

“아니,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음식이란 말인가?” 사또가 노발대발하자 아전들은 냉큼 주모를 시켜 쌀밥과 고깃국을 대령했다. 그러는 사이에 노인과 아이는 잠자코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야흐로 사또가 식사를 끝낼 무렵, 이 정승 집 하인이 사또를 찾아왔다.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고관 벼슬을 지낸 어른이 부르자, 사또는 부리나케 정승 집 대문간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섬돌 밑에서 큰절을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전에 주막에서 보았던 바로 그 노인이 아닌가. 비로소 사태를 깨달은 신관 사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대감, 아까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오목 이 정승의 추상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세차게 때렸다. “그대는 전하의 교지를 받들고 부임한 관리로서 그 책임이 막중한데도 교만한 위세를 부렸으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백성들이 먹는 보리밥을 입안에 넣었다가 뱉어버리는 행위는, 도저히 목민관으로서 있을 수 없다. 그런 방자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어찌 한 고을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당장 벼슬 자리를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뜻을 품고 장단 고을에 부임했던 신관 사또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낙향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자신이 귀하게 되자 겸양하지 못하고 교만함을 드러냄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였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지위가 올라가고 학문이 깊어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고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 시대에는 벼슬이 정3품인 당상관에 이르면 낮은 가마인 평교자를 타도록 법으로 정해 두기까지 했다.

클린턴 버나드는 “진실로 위대한 사람들은 남들을 조종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조종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기념하여 탑을 세우겠다고 주장해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도 당대 과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졌지만,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겸손했다고 한다.

위대함이란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을 자기 입으로 떠벌리지 않는 것이다(참고자료: 이상각이 지은 <마음이 여유로우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 교만과 아집의 샘물을 마신 사람은 자기 삶의 발자취에 오점을 남기기 쉽고, 자기의 공든 탑을 자기 손으로 훼손하게 된다. 겸손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