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의 히브리적 사고이다. 중생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중심의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복을 주시는 분도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감사의 대상도 되시면서 또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사화복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살전 5:16-18).

잘 살아 보겠다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돌아온 나오미는, 자신을 맞아 주는 베들레헴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가 아닌 ‘마라’라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미’는 ‘즐거움’이고, ‘마라’는 ‘쓰다’는 뜻으로 ‘괴로움’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룻 1:20)고 호소하였다. 이는 나오미가 모압에서 겪었던 어려움 즉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의 죽음은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고백이다. 그것은 또한 저주를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런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기대이기도 하다. 룻기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에 내린 저주를 풀어나가시는 과정을 소상하게 소개하는 책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우리 안에서’는 ‘우리를 통해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활용하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위해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소원을 두고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텔로’는 ‘마음이 내키게 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억지로 일하게 하지 않으신다. 일을 하게 하시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신다. 때로는 분명하게 지시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영성생활에서 가장 우선순위이다. 그렇게 하려면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날마다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곧 영성지수를 높이는 성령 충만한 삶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게 하신다. 여기에서 ‘기쁘신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도키아’는 ‘찬동’ ‘호의’ ‘의도’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라촌’인데, ‘즐거움’ 혹은 ‘만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흡족함과 즐거움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만족하심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즐거움과 행복을 되돌려 주시는 근거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은 곧 우리의 행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인생의 최고 우선적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먼저이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순서가 바르면 바른 신앙이 되지만, 순서가 뒤바뀌면 신앙의 역행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는 것은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은 그에 대한 보상도 마련해 주신다. 우리들이 은사를 따라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즐거움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내재시켜 놓으신 원천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한다. ‘원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공귀스모스’는 불만을 속으로 억누르는 ‘투덜거림’이다. 일 자체에 대해 의미나 보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흡족함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비’로 번역된 헬라어 ‘디알로기스모스’는 기본적으로 ‘논쟁’을 의미하지만, ‘의심’이나 ‘망설임’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다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음으로 인하여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없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감사와 확신으로 하라’는 것과 상통한다. ‘감사’와 ‘확신’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다는 내적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욕심으로 일하는 증거가 아닐까?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