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았던 각종 나무들도 이제 약간은 지친 듯한 모습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들떠 있던 우리들의 마음도 차분한 정리정돈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음악으로 말하면 빨랐던 음표 다음 차분한 쉼표로 들어간다고나 할까. 이런 시점에서 침착하게 신앙 명상의 몇 구절을 나누어 보자.

“거룩하신 하나님, 가을 가뭄 덕분에 단풍은 매우 곱습니다. 봄, 여름을 지내며 엽록소를 만드느라 분주했던 나무들이 문득 활동을 멈추더니, 이제는 저마다의 빛깔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잠깐. 오랜 시간 비바람에 뒤척이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던 줄기를 미련 없이 놓아 버리는 잎의 자유낙하를 바라보며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 떠나야 할 곳 떠나지 못해,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의 삶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건드리면 ‘쨍’ 소리라도 날 것 같은 저 짙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한 시인의 명징한 마음이, 오욕에 찌든 우리 마음과 대비되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 주님의 현존을 깊이 느끼며 내면의 뜰에서 조용히 거닐고 싶습니다. 저물녘 정적이 깃든 가을 강물 위를 스치듯 나는 새들처럼, 주님의 마음을 향해 그렇게 날아가고 싶습니다. 덧없는 희망으로 어지럽힌 마음을, 모호하고 위험한 생각을, 허망한 열정을, 그리고 기쁜 숨결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바람처럼 불어와 죽은 생명을 살리는 더 큰 숨결로 새롭게 허락하실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가슴 휑한 이웃들은 여전히 울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꿈을 지필 나무토막조차 얻지 못한 이들은, 풍년이 들어도 기뻐할 수만은 없는 농민들은, 새벽 인력시장에 나와 서성이는 노동자들은, 자식들에게 사교육은 언감생심, 자격지심에 지청구나 늘어놓는 부모들은 문안과 문 밖,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떨고 있는 문풍지처럼 절망한답니다. 저들의 시린 마음을 덮어줄 이불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사랑에 무능한 자들이 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주님!

가룟 유다는 입을 맞추며 주님을 팔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도 입 맞추어 주님을 추방하였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님은 지금도 머무실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계십니다. 이 땅의 교회들은 말구유의 예수님을 잊은 듯합니다.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 오신 주님의 희생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입술의 고백 속에서만 있을 뿐, 그 고단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당이 화려해질수록 정신의 빈곤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교권을 잡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이전투구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몰염치의 욕망들이 사투를 벌이는 이 난장판을 보며 주님, 얼마나 절통하십니까?

사데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주님, 매를 들어서라도 이 땅의 교회가 빠져 있는 혼곤한 잠에서 우리들을 깨워주십시오. 주님, 이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며 샛별이 솟아오는 새벽이 오기를 한사코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사람들은 지갑을 잃어버리면 즉각 알아차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본디 마음은 다 잃어버려도 모른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자각은 매우 아프지만,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일 수도 있다. 회개란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일상의 초점을 바로잡는 일이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속에 흐를 때, 그래서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 속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

신발 들고 좇아갈 목표가 없어서인가? 기독교 신자들의 시선이 쓸쓸하기만 하다. 드러내놓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부러움을 동반한 쓸쓸함이다. 교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이 곱지가 않다. 이런 씁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을 비춰 주는 거울을 입김 불어 다시 깨끗하게 닦아야겠다.

지금 우리들의 일상은 ‘나와 당신’의 관계보다 ‘나와 그것’의 관계 위에서 운영되고 있다. ‘그것’의 세상에서 우리들은 너무 외롭다. ‘그것’의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삶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이중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책임이요, 또 하나는 이웃을 향한 수평적 책임이다. 그 교차점에 자신을 향한 책임이 있다. 이 상향 신앙, 외향 신앙, 그리고 내향 신앙에서 성공해야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