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기독교 신정론이 대두되는 이유

“악(惡)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시라면 악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 아닌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도대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는 오랫동안 신학과 철학의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까지 지속되는 논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악(惡)’에는 살인이나 강도·강간 등 악한 행위와 함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 심지어는 질병이나 가족·친지의 죽음 등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不幸)마저도 포함된다. 필자의 동서가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정말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예수 믿던 착한 장모님께서 주일에 억울하게 버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는가? 따라서 나는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이렇게 악(惡)의 문제는 오늘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최대의 ‘물음’ 중 하나다. 나아가 ‘죄’를 저지르는 사람까지도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는가”라며 하나님이나 부모님께 공을 떠넘기고 하나님과 부모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신정론적 물음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이는 역대 최고 철학자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심오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정말 악을 예비하셨는가?” 하는 ‘예정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렇듯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조성자라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Deus est auctor, causa omnis entis, Unde malum?)” “하나님은 왜 악을 방치하고 보고만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 바로 신정론(神正論)이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에서 “참으로 정교한 이 세상을 보라. 어찌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전혀 반대로 말할 수 있다. 즉 “이 온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와 불공평과 아비규환을 보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반론을 펴는 것이다. 간혹 지적설계론자나 창조론자들이 춘하추동의 절묘한 계절 변화를 창조의 증거로 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만일 100여 년 전 필리핀에 사는 원주민 신앙인이라면 필리핀의 변하지 않는 온화한 기후야말로 창조의 증거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논리로 반대이론을 펼치는 게 사람의 논리이다.

사람들은 억울한 성추행 피해, 살인 피해, 선교사의 피살, 선량한 사람이 당하는 많은 억울한 일들, 이유를 모르는 암의 고통 등등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신학과 철학에 던지기 마련이다. 바로 신정론에서 이런 고민이 발견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악과 관련된 신정론의 문제는 성경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된 중요한 논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악

악(惡)으로 번역되는 여러 성경구절 가운데 주된 것은 히브리어 ‘라’(רע, 800번 나옴)와 헬라어 ‘포네로스’(πονηρὸς, 82번 나옴)와 카코스(κᾰκός, 78번 나옴)가 있다. 이 외에도 악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히브리어 ‘딥바’(민 13:32)와 ‘아웬’(욥 15:35)과 ‘짐마’(잠 21:27)와 ‘라솨’(시 140:8), 그리고 헬라어 에피투미아(ἐπιθυμία)와 카코포이에오(κᾰκοποιέω, 막 3:4) 등이다. 이들 구절들은 모두 ‘나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어의 뉘앙스가 서로 다르듯, 악은 단순하지가 않다. 사회적 악, 윤리·도덕적 악, 자연적 악, 육체적 악이 모두 나쁜 것들이다. 즉 범죄, 죽음, 아픔, 고통, 지진, 해일, 홍수, 가뭄, 재앙, 질병, 고통, 가난함, 괴롭힘 등등이 모두 나쁜 것들이다. 심지어 성경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한 것들(창 38:7, 신 4:25, 시 51:4)과 이웃과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해로운 것들도 있음을 지적한다. 종교적·관계적 악들도 많은 것이다. 하나님을 떠남(대하 12:14)과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신 17:2),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 모두 ‘악’하다. 이들 광범위한 성경적 악의 개념들을 모두 신정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악 자체의 신학적 논증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분명 딜레마이다. 시편 기자는 무수한 재앙(악)이 나를 둘러쌌다(시 40:12)고 탄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석의 기본 로드맵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라는 선포를 초라하거나 공허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철학적 논쟁은 있었으나, 성경적 해석의 구체적 로드맵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본 논고는 바로 지금까지 논의된 학문적 공헌을 바탕으로, 성경의 주요 인물군(群) 가운데 신정론적 12가지 주제와 부합되는 대표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성경적 해석의 기초 골격 작업을 하려는 데 있다.

기독교 신정론의 딜레마

신정론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이 합성된 말로,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신정론이라는 개념은 초기 계몽주의자이며 루터파 교도였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저서 ‘신정론(Theodizee, 원제: Essais de théodicée, 1710)’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논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 속에서 악의 문제를 투영해 보려는, 모든 형태의 유일신 종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정론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가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이다.’ 여기서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시지 않다는 논리이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의 플라톤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가장 역설적인 형태의 신정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창조의 선성(善性)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악을 포함한 모든 역사적 섭리와 진리에 대해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역설적 진리를 해석하고 논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정론은 늘 독특한 과제와 딜레마를 안고 있다.

기독교 신정론의 전제

기독교 신정론은 직접적 신 존재 증명은 아니다. 다만 신 존재 증명을 하다 보면 부딪히게 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기독교 신정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기본 전제가 확보되어야 한다. 첫째로 성경적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정론은 제기되지 않는다. 둘째, 성경적 신이 선하다고 할 때 그 선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함과 일정한 부분에서 일치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선악 개념과 신이 가진 선악 개념이 다르다고 한다면, 신정론 이전의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성경적으로 세상은 이미 대단히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를 상실한 상태이다. 더구나 21세기 포스트모던 사상 속에서 이 문제는 전제 없이 접근할 수는 없다. 불변의 진리가 없다는 주장 자체도 또 다른 전제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철학적 관점이 아닌, 성경이라는 그 불변의 토대 아래서 선악의 유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뇌

라이프니츠가 주로 철학의 관점에서 이 신정론 문제를 처음 다루었으나, 악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의 부분은 주로 섭리론(攝理論)에서 나타났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은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천지와 모든 피조물들을 붙드시며, 잎사귀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과 식수, 건강과 병, 풍부와 가난 등 모든 것들을 우연이 아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세계를 다스리신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악한 사건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유를 잘못 오용한 데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도 주권을 사용하시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들에게서 선한 것을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어거스틴이 보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악은 결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악도 결국 이상한 괴물이 아니라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이해하였다. 악은 어떤 독자적 실체성(reality)가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하나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악에 대한 책임을 결코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다. 악은 허용하도록 놔두신 것일 뿐,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는 없다고 본다. 악은 단지 선을 상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악은 더 큰 선(善)을 위한 창조의 한 부분이다. 문제는 악에 대한 이 같은 입장은 도덕적 악에 대해서는 일부 설명이 가능하나, 자연적 악에 대해서는 논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악은 실재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핍의 원인에 속한다. 결국 이 같은 악의 근본 원인은 자유의지를 오용한 인간의 책임 안에서 생겨난다. 이 같은 도덕적 악에 대한 설명은, 자연의 물리적 악에 대한 설명에 근본적 난제를 제공한다. 존 힉(John Hick)은 자신의 책 『악과 사랑의 하나님』(Evil and the God of Love)에서 어거스틴적인 것과 구분하여 악을 영혼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과정으로 간주한 이레네우스(Irenaeus)적인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레네우스적 관점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을 모두 창조 단계의 과정으로 보게 된다.

신학은 철학자들의 물음에 주로 ‘십자가’의 신정론으로 나아간다. 루터는 늘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세상적 사변의 한계를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 인식을 드러낸다. 루터는 사탄 속에서도 일하시는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악과 고난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유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가면(Verba Dei)으로 풀이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고유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낯선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루터의 논증에도 딜레마가 있다. 마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처럼 “결국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이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었을 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것, 미래의 불안에서 참 자유를 가지는 것은 모두 반드시 섭리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최고의 복이다. 칼빈에게 있어 섭리론은 예정론과 동일한 실천적 목적을 가지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성급한 확신을 벗겨내고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수백 가지의 위험을 확신과 용기로 대처하게 한다. 모든 피조물을 변함없이 붙드시고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동일한 비를 내리시며(마 5:45)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판의 백합화를 돌보시며(마 6:26-30)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신 분(마 10:30)께서 하물며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칼빈의 견해는, 어거스틴보다 자연적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 조금 진전된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악의 근원에 대한 신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뇐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내며,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한다. 하지만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문제는 몰트만에게 있어서도 난제였다. 몰트만적 견해는 신정론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과 죽음조차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악은 당연히 사라진다. 어찌 보면 악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더라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것을 미루어 놓으면 해결될 듯 보이던 것이, 지옥의 영벌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정론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치명적 결함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위에 모든 것을 의지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볼 때 모든 사건이 모두 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스토아적 개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 의지로 보았다.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 사건을 통할 때, 악의 문제조차 해결의 근원을 찾게 된다. 그렇게 해서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사악한 신’의 선포자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실존적 피조물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기 마련이다. 바르트는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하였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 문제로 제한하려는 관점을 저지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답게, 섭리론을 재정립하면서 악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보편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다운 새로운 접근인 동시에, 악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초월적 해석의 프레임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동시에 가지게 만든다. <계속>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