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잦은 장맛비로 오랜 가뭄은 해갈되었다. 바닥을 드러냈던 호수는 정겨운 물결을 일으키고, 몸통까지 드러냈던 계곡의 바위들은 굽이굽이 내려치는 물결을 맞닥뜨리며 연신 하얀 물거품을 내뿜는다.

여름이다. 매미의 우렁찬 외침이 태양을 찌른다. 국내외 유명 관광지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향하는 현대인들의 역동적인 여름나기가 절정에 이른 주간인 듯싶다.

더러는 정적 칩거를 통하여 잠재된 능력을 재발견하는 쉼을 계획했을 터이고, 더러는 음지의 환경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을 돌아보는 선한 가치를 실천하고자 계획한 쉼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정적이건 역동적이건, 쉼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분명하다.

쉼은 획일적 일상에서의 일탈을 넘어, 잠재된 욕구를 선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재발견의 시간일 수 있다. 쉼은 모든 것을 다 쏟아놓고 다시 하나씩 골라 담는 책상 서랍 정리처럼, 익숙한 모든 환경과 일상을 내려놓아야 보이는 새로운 가치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보장한다.

쉼은 소망을 향하는 마음을 열어주고 풍성한 것들을 공급한다. 쉼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은 용기 있는 결단과 불확실한 미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도전을 실천한다면 아름다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주저할 시간이 없다. 인생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른 시간 안에서의 움직임이다.

의식주를 우선하는 고정관념적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사회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소신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공계를 전공한 시인, 문과를 전공한 기능인,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소설가, 중년을 훌쩍 넘긴 노장들의 만학 열기, 반대로 기꺼이 대학을 포기하고 천부적 예감을 파고드는 아티스트들의 모습 등은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재발견이라는 명제를 느끼게 한다.

폭염 속에도 언제나 중절모에 정장을 차려 입고 명동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시인 박인환의 죽음 뒤 그의 집에 쌀이 떨어진 줄 알게 된 후일담처럼, 인생은 당장의 가치보다 더 숭고한 가치들이 충만한 가운데 유수와 같이 흐르는 시간이다.

지금 우리는 여유로운 쉼을 통하여 일상을 돌아보고 재발견의 가치들을 수용하는 시간 앞에 서 있다.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꽃씨를 옮겨주는 바람처럼, 흩어짐을 통하여 복음을 확산시켜 오신 하나님의 순리를 거스르는 움집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될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동성애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저들 목소리를 드높이고, 성도들은 불신자들과의 혼인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망극의 시대에 우리는 무감각한 자세로 서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악령을 뒤집어 쓰고 불지옥을 향하고 있는 인생들과 혼탁하게 공존하고 있다. 그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세상 문화에 녹아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다.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우리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성도들이다. 세상과의 타협을 불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생명의 복음을 위하여 작은 밀알의 역할을 이끌어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여러 교회들이 기도원에서, 수련원에서, 연수원에서 뜨거운 기도와 더불어 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도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역 앞에, 새로운 목적을 이끌어내는 시간 앞에 서야 한다.

수많은 개척교회들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골마을처럼 적막 속에서 탄식하고 있다. 성도들은 결단코 어느새 길들여진 익숙한 환경들을 뒤로 하고 복음의 확산을 위한 밀알의 역할을 찾아나서야 한다.

성도들끼리의 안녕보다 중세 시대의 휘황한 성당 같은 교회에서의 안취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시간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사역의 환경을 찾아보는 쉼의 시간이기를 염원해 본다.

성도들의 쉼은, 생명이 다한 날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특별하고 긴 포상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샬롬!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