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이 7월 5일 좋은소식교회의 주일예배에서 전한 설교문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제가 2010년부터 매년에 한 번씩 좋은소식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는데, 금년에는 두 번째로 와서 설교를 합니다. 지난 1월 18일 주일 여기 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솔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솔한 삶”이란 첫째로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의 부끄러운 죄악의 모습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드러내는 “회개와 참회의 삶”이고, 둘째로 귀를 활짝 열고 순종하는 “들을 귀와 순종할 마음을 지닌 삶”이고, 셋째로 손을 활짝 열고 모두를 품으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루만져 주시고 안아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어거스틴과 칼빈이 말했는데, 저는 여기에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조금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사도신경).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데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죄인들의 구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시고”(사도신경).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데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을 믿사오며”(사도신경).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16,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들이지만 원죄와 자범죄로 심판을 받게 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제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로 줄여서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위로의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너무 인자하시고 너무 따뜻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분이시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말씀했습니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46:3,4).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우리를 그저 내려다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 위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너무 인자하시고 너무 따뜻하신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어루만져준다” 라는 표현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접촉 즉 touch 라는 표현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신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만져주시고 머리에 손을 얻어 기도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3,16). 눅 15장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나쁜 짓만 하던 둘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너무 괴롭고 고통이 많아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 올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저기 멀리서 돌아오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주셨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꼭 안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저 위에서 혼자 계신 분이 아니라 저 위에서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못된 짓만 하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너무 인자하시고 너무 따뜻하신 분이십니다. 너무 이상하신 분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요사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너무 이상하신 분”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접촉의 존재, 안기는 존재, 품기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 아기를 보세요. 엄마가 어루만져줍니다. 엄마가 안아줍니다. 엄마가 품어줍니다. 어떨 때는 종일 어루만져주고 종일 안아주고 종일 품어줍니다. 엄마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기를 어루만져주고 안아주고 품어주는 존재입니다. 잘 때나 깰 때나 밤이나 낮이나 엄마는 아기를 어루만져주고 안아주고 품어줍니다. 아기는 어떤 존재입니까? 접촉의 존재, 안기는 존재, 품기는 존재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웁니다. 왜 울까요? 의사들이 말하기를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 품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운다고 합니다. 엄마 품이 따뜻하고 편안했는데 세상에 나오니까 큰일났구나 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것을 “출생 충격”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간호원이 빨리 아기를 안아준다고 합니다. 엄마 뱃속으로 돌려 보낼 수 없으니까 간호원이 빨리 안아주면 울음을 그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꼭 안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엄마 품을 떠나면 아기는 웁니다. 우리 인생은 엄마 품을 떠나면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엄마의 손을 떠나면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사실 엄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은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어루만짐을 받고 안김을 받고 품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미국의 제임스 하디슨(james Hardison)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접촉의 존재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접촉의 존재이다. 인간은 접촉 없이는 창조될 수도 없다. 인간은 접촉이 없이는 살아 갈수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접촉과 부모의 접촉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너무너무 귀중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켈란젤로란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가 “Creation of men” 즉 “인간의 창조” 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아담이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미켈란젤로가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바다에서 솟아난 게 아닙니다. 미켈란젤로가 “인간의 창조”란 그림을 그렸는데 아담이 있고 그 옆에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길게 뻗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 하나님이 손을 뻗쳐서 만드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리고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까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빠와 접촉에 의해서 아기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엄마의 몸 속에서 열 달 동안 만짐을 받다가 태어나서 사람이 됩니다. 결국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애기 때도 그렇고 어른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을 늘 그리워합니다. 저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수 십 번씩 또는 백여 번씩 계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성령님의 간구하심과 도우심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부족한 죄인을 계속해서 심부름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사람은 어머니의 품이 그립고 하나님의 품이 그리운 존재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의 르네 스피츠(Spitz) 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국립병원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아기 때부터 고아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양분을 많이 공급하고 위생시설을 잘 했습니다. 아기들이 불쌍해서 스피츠 박사가 아기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기들이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를 않았습니다. 아기들이 자꾸 병이 들었습니다. 제일 좋은 영양분을 공급하고 제일 좋은 시설을 공급해 줬는데 왜 아이들이 병이 들까? 이게 무슨 병일까? 스피츠 의사는 그 병을 “시드는 병” 즉 마라스므스(Marasmus) 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스피츠 박사가 그 해 겨울 멕시코에 겨울 휴가를 갔습니다. 거기 고아들을 키우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 가 보았는데 시설이 좋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영양분을 잘 공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습니다. 병도 안 걸렸습니다. 왜 그럴까? 그 비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동네에 사는 부인들이 매일 병원에 와서 아이들하고 놀아주고 아이들을 안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네를 타고 이야기도 해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 아이들은 안아줘야 행복하구나! 아! 아이들은 아무리 음식을 잘해주어도 행복하지 않구나! 아! 아이들은 안아주고 함께 놀아주어야 행복하구나!” 그래서 스피치 박사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접촉을 가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유모차에서 피부의 접촉이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약해졌다. 점점 세포들이 죽어갔다. 우유병으로 키우면 병이 많아진다. 가장 강한 접촉은 입과 입술로 엄마의 젖을 빨아 먹는 것이다. 엄마의 젖을 빨아 먹지 못하고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아이들은 병에 많이 들었다.” 너무너무 귀중한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열왕기상 19장에 나타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대단히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한번 기도하면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했습니다. 비가 안 오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유명해 지는 게 문제였습니다. 목사님들이 너무 성공하고 너무 유명해 지면 그것도 위태로운 일입니다. 설교를 너무 잘하고 기도를 너무 잘하고 능력을 너무 많이 나타내면 그것도 위태로운 일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왕상19:3-5). 환경이 갑자기 적대적으로 바뀌어질 때 높임을 받던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요나는 망해야 할 니느웨가 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욘4:3,8). 엘리야는 이세벨의 적대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극도의 절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너무 성공해도 문제이고 너무 유명해져도 문제이고 너무 능력이 많아져도 문제이고 너무 높임을 받아도 문제입니다. 죽고 싶다고 하면서 절망에 처하게도 됩니다.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을 가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못된 놈이라고 몽둥이를 들고 때리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시고 또 어루만져주셨다고 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왕상19:5-7). 여기 “어루만졌다”는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너무 인자하시고 너무 자비로우시고 너무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놀라우신 분이시고 이상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무 인자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어미가 아기를 불쌍히 여김 같이,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너무 따뜻하시고 너무 인정이 많으신 이상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이상한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위로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어루만져주시고 또 어루만져주시고 먹을 것과 마실 물까지 주셨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죽겠다고 하며 쓸어졌다가 일어났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40주 40야를 뛰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8).

둘째로, 어떤 사람이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과 물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그릇이 깨어지니까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1-6).

사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만드시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가리켜서 흙으로 빚어서 만든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깨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기 때는 예쁘게 잘 자라고 소년 때도 잘 자라다가 어느 땐가 인격이 깨어지고 아름다움이 깨어질 수가 있고 착함도 믿음도 사랑도 깨어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살다가 깨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4절에 보면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깨어졌는데 토기장이가 깨어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다시 더 멋진 그릇으로 만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이스라엘 족속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너희들이 깨어졌다고 내가 너희를 버리겠느냐? 내가 내 손으로 다시 너희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드느니라.” “너희가 좀 깨어졌어도 안 버리고 내 손으로 너희를 다시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드느니라. 내 아들 예수의 피를 너희에게 부어주고, 내 말씀을 너희에게 부어주고, 내 성령을 너희에게 부어주어서 너희를 다시 만들어 주느니라.” 하나님의 손은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손 입니다. 깨어진 그릇을 버리시지 않고 다시 손으로 빚어서 더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주시는 너무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 “하나님의 손 바닥” 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성경 말씀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우리가 길을 가다가 넘어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붙들어주신다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시편104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우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104:28,29). 시편119편에 보면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세우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시119:73). 시편139편에 보면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전후를 두르시며 안수하시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오른 손이 우리를 붙드신다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5,9,10). 이사야 4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어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사야 49장에 보면 엄마가 자기 애기를 버리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고 그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시고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 하나님의 손은 참으로 신기한 손입니다. 넘어지는 자를 붙들어주시는 손, 두려워하고 놀랄 때 붙들어주시며 도와주시는 손, 어디를 가든지 붙들어주시는 손,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들의 이름을 손 바닥에 새기시고 잊지 아니하시는 너무 신기하고 너무 이상한 사랑의 손입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제자들을 손으로 만져주셨다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4장 이하에 보면 여러 종류의 병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고쳐주시지 않고 문둥병 자도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도 소경도 그 이외의 모든 병자들도 모두 손으로 만져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마8:3). “그의 손을 만자시니”(마8:15).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마9:29).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4:40).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물을 떠다가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자기 손으로 만지시며 씻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5). 몸만 만져주신 것이 아니고 발도 만져 주셨습니다. 계시록 1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설수가 없어서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오른 손을 그에게 대시며 만져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1:17).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황송한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의 손, 피가 흐르는 구속의 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능력의 손, 지옥 문을 닫고 하늘 문을 여시는 손, 그 손으로 우리들을 만져주시면 우리들의 운명이 바꾸어 집니다. 우리들의 삶이 회복됩니다. 저주의 삶이 축복의 삶으로 회복됩니다. 시편 31편 15절에 보면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대가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은 대단한 손입니다.

다섯째로,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는 아니고 저와 관련된 어루만져주고 안아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어린이들을 자주 안아주곤 했습니다. 제가 안아주면 1시간 또는 두 시간 제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아기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기가 5살 되었을 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목사님께 메리 크리스마스.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 이레예요. 목사님 저 어렸을 때 많이 많이 돌봐주시고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항상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또 할말 있어요. 자 나중에 크면 놀러 갈께요. ♡ ♡ 해요 이레 올림 2004.12.31” 어린이들이 저에게 보낸 편지들이 너무너무 많은 데 편지 하나만 더 소개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선희에요. 생각해 보면… 제 기억 속의 목사님은 뭔가 주시는 분입니다.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저녁예배에 온 저를 목사님 방에 데려가셔서 맛있는 초콜렛이나 스마일 뱃지를 주곤 하셨죠 ^^ 게다가 예배가 끝나면 항상 안아 주시고요. 커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목사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제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2002.5 황선희 올림”

이야기 하나를 더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8년 10월 독일 슐란트하임 게뮨트에서 모인 연합수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일이 있었습니다. 5개의 작은 교회들로부터 백여 명 이상의 신자들이 함께 산 속에 모였습니다. 1년에 한번씩 함께 모이는 모임이라 서로들 만나서 너무 반가워하며 좋아했습니다. 저는 연합수양회에서 1시간 30분 가량의 긴 설교를 다섯 번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말보다 설교보다 감성보다 흥분보다 프로그램보다 음악보다 이적보다 체험보다 주님 닮으려고 하는 진실하고 소박한 삶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조용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수양회 참석자들의 마음 가짐이 순수하고 간절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금요일 저녁 세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세 번째 설교를 마쳤습니다. 연합수양회의 준비위원장의 일을 맡은 김익진 목사님이 나와서 “혹 강사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라도 좋으니 남아 주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몇 명이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마이크를 붙잡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주고 또 해주어도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20명, 30명, 40명, 50명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는 별 생각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자기들 형편에 꼭 맞는 기도를 해주었다고 고백했고 자기들이 기도 부탁을 하려고 했던 기도를 해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안수기도는 1시간 20여분까지 계속되었다고 했고 90여명의 신자들이 모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마지막 다섯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후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고 줄을 서서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 청년은 나보고 좀 오래 꼭 안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조금 후 다시 내게로 와서 다시 한 번 좀 오래 꼭 안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라고 물었습니다. “저 바이올린 공부하고 있어요” “그럼 학교에 다니고 있니?” 라고 물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목사님 한 분이 “제 며느리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면서 저들이 가슴에 지니고 있을지 모르는 “애틋한 향수”를 함께 느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가족에 대한, 고국에 대한, 고국 교회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함께 느꼈습니다. 아니 저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모의 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나의 품에 꼭 안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저들이 모두 측은하게 보이기도 하고 예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 모두를 품에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권사님 한 분도 안아달라고 해서 꼭 안아드렸고 나중에는 김익진 목사님의 사모가 헤어지기 전에 안아달라고 해서 꼭 안아 주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사람은 안아주어야 하는 존재이고 어루만짐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수 십 번씩 또는 백여 번씩 계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성령님의 간구하심과 도우심으로 나를 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부족한 죄인을 계속해서 심부름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사람은 어머님의 품이 그립고 하나님의 품이 그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면 넘어지는 것도 겁이 안 나고, 병드는 것도 겁이 안 나고, 실패하는 것도 겁이 안 나고, 죽는 것도 겁이 안 납니다. “주님의 손으로 나를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옵소서.” 저는 사46장 3절 4절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 말씀을 읽으므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46:3,4). 안고 품어 주시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아버지, 나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병들 때에도, 속상할 때에도, 지칠 때에도, 죽고 싶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 나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라고 중얼거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주님 품 안에서 하루 하루를 행복하고 기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품에 편히 안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