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시대마다 개인의 유익을 멀리하고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소중한 일생의 가치를 부여한 의인들이 나타난다. 스스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일생의 가치를 청백에 두고 살다 간 선인들의 굳센 신념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족적이고 교훈이다.

각계각층이 부정한 재물 축적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현실이, 오늘의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자화상이다. 대한민국 삼천 리 구석 어디엔가 덕망 있는 인재가 어찌 한 사람 없겠느냐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정부패의 울타리 안에서 설쳐대는 간신들에 의해 가려져, 개똥밭 같은 위정자들의 세계를 멀리하고 있으리라.

날씨가 흐리다. 안개비가 내리는 듯 해가 없다. 비도 아닌 것이, 구름도 아닌 것이, 눈앞에 보이던 장산까지 허리를 휘감고 기이한 풍경을 펼쳐놓는다. 마치 인생들의 크고 작은 허물을 덮어두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메인 뉴스는 검찰청사 앞이다. 심증은 있는데 법리적으로 물증이 없는 사람들이, 구속을 모면한 기쁨의 미소를 참아내며 연일 검찰청사를 빠져 나온다. 운우 속에 가려진 풍경 같은 인생들의 흠이다. 수사를 받고 나오는 낯짝들은 한결같이 번들하고 두껍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증거 부족으로 인하여 구속을 면했다지만, 어찌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으랴. 머리카락까지 계수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대충 기억해 보아도 국무총리 2명, 국회의장, 참모총장, 고위 공무원, 기관장, 대기업 수장, 검찰 수장, 대형교회 목회자까지 검찰청에 불려 다녔다. 어쩌면 검찰청에서 불러야만 큰 인물인 시대인가 보다.

불과 일백 년 안팎 살다 가는 한시적 생명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죽음조차 외면한 채 쌓은 재물의 소욕은, 죽음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후회의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닥친 자신의 죽음 앞에 서면 후회가 막급할 터. 조금 호사도 부려 보지도, 나눔을 통한 사회적 기여를 실천해 보지도, 가족에 국한된 물질관을 벗어나 보다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추구하지도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생들의 세상은 운우에 가려진 풍경과 같다. 진실을 왜곡하고 양심을 외면해야만 소유할 수 있는 검은 물질들이 호사를 품게 한다. 불법과 편법 사이를 곡예하는 삐에로처럼, 줄타기를 잘해야만 움켜쥘 수 있는 재물은 항상 검은 유혹의 덫으로 육신의 안락을 갈구하는 인생들의 곁을 서성거린다.

운우가 점점 넓게 퍼진다. 공항으로 향하는 전철의 규칙음에 익숙해질 무렵, 영종대교를 건너는 차창으로 바다 물결이 정겹다. 태양은 보이지 않아도, 빛이 있기에 볼 수 있는 운우의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인생들이 어두움을 분별하고 밝은 사회 구성원로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빛으로 세상을 감지하시고 세상 어두움을 다스리시는 절대자의 숭고한 창조 질서 안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빛이 없는 날에도 운우의 풍경이 보이는 것은, 어디에선가 빛이 비추고 있기에 가능하다. 아름다운 운우의 풍경도 빛이 존재하기에 빛 안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우에 가려진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일상을 침묵으로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거짓의 앙금을 씻어버릴 수 있는 운우의 날은, 영생을 은혜로 준비하신, 빛의 주인을 만나는 특별한 날이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