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목사(가운데)와 정용섭 목사(오른쪽)가 대담에 나섰다. 맨 왼쪽은 사회를 맡은 윤철호 교수(장신대). ⓒ김진영 기자

‘설교자’인 박영선 목사(남포교회)와 ‘설교 비평가’인 정용섭 목사(대구 샘터교회)가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11일 오후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김영용)에서 대담했다. 이를 요약·정리했다.

1. 설교란 무엇인가?

박영선 목사(이하 박): 증언일 때도, 설명일 때도 있다. 기대와 다른 현실, 약속과 다른 과정, 이런 것들로 인한 몸부림이 마치 비명처럼 설교에서 터져 나온다. 이것이 균형 있는 설교의 정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험한 것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절대다수의 설교자들은 자신이 할 줄 모르는 것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할 줄 모르는 것을 진지하게 하다보면 ‘비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용섭 목사(이하 정): 박 목사님께서 “비명”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악!” 하는 소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성서의 기자들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절대적인 어떤 것을 경험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 설교자는 일단 놀라야 한다. 질적인 차이에 대한 막막함으로 인해.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선포해야만 하는 딜레마 속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청중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언어행위’일 것이다.

2.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박: 설교자가 ‘나 역시 청중들 중 하나’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구름 위에 떠 있거나, 강 건너에서 손을 흔들어선 안 된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종종 가르치려 하고 우월하려 한다.

설교를 멋있게 하려고 하지 말라. 돌아보면 우리는 그 어떤 보약이 아닌, 매끼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그 나물에 그 밥’을 먹고 컸다. 그런 점에서 대가가 아니라면, 주제설교보다는 강해설교를 했으면 한다. 잘하기보다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그저 따라가면서 전해도 될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식들을 키우실 것이다.

정: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일단 경험해야 한다. 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것을 촘촘히 읽어내는 능력,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3. 설교자는 누구인가?

박: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다. 그런데 그렇게 하셔서 청중들을 대신해 자신에게 질문을 하라고 하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하라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양면이 다 있을 텐데,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양쪽을 왔다갔다 한다. 그러면서 점점 자라왔다.

정: 설교를 정의하며 언급했듯이, 설교자는 안내하는 자다. 그러자면 그 대상을 먼저 잘 알아야 한다. 바둑에서 고수의 수를 하수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둑의 기사들이 복기(復棋)를 하고 피아니스트가 방대한 양의 악보를 외우는 것은, 그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할 수는 없다.

4.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는?

박: 설교 행위는 하나님의 임재와 권위를 상징한다. 예배 중 설교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예배에 임재하시고 그분의 권위를 선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설교자가 강단에 선다는 것은 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중 하나를 설교자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케 하심으로써, 청중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일이다.

정: 설교와 목회보다 설교와 예배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에 대한 응답이라는 예배의 과정에서 설교가 적절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선 설교가 과대포장된 경향이 있다. 그걸 조금 줄였으면 한다.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에 그 무게를 조금 줄이자는 것이다. 대신 ‘예전 예배’로 가는 것이 좋겠다.

▲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신앙에서 ‘기다림’이란…

이상 네 가지 큰 주제 외에도 다양한 문답이 있었다. 그 중 ‘기다림’에 대한 박영선 목사의 말을 추가한다.

“나는 ‘근본주의’ 진영에서 컸다. 나의 선택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합창’에 비유하자면 근본주의는 ‘베이스’와 같다. 베이스는 비록 멜로디가 없지만, 이것이 없으면 합창이 되지 않는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근본주의는 무대다. 이 위에서 연극과 연주가 이뤄진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가 130년이 됐는데, 아직은 콘텍스트(상황)가 더 구축돼야 한다고 본다. 가령 우리가 ‘술을 마시느냐’ 혹은 ‘담배를 피우느냐’를 가지고 신앙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이런 것을 넘어 보다 다양한 콘텍스트를 담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 신앙과 관련해선,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욕조에 물을 받으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잠시 나갔다가, ‘다 찼나’ 싶어 확인하면 여전히 중간 쯤밖에 차지 않은 것을 볼 때가 있다. 분명 수도꼭지에선 물이 흐르지만 그것이 욕조를 채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의 의문들이, 당장에 어떤 답을 듣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물이 차면 어느 새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소설이 사전과 다른 것은, 줄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줄거리는 또한 독자들을 납득시킨다. 그런데 납득을 위해선 긴장이 필요하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궁금증, 예상치 못한 전개에 따른 당황, 때론 공포와 아픔들이 절정을 넘어 결말에 이르게 하는 요소들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쓰신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신앙의 긴장, 곧 의문과 답답함 등이 때로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말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이런 긴장 대신 편안한 상황만을 원한다. 혹 지금 여러 의문들로 복잡하고 답답한가? 그렇다면 믿고 기대하고 기다리라. 반드시 답을 주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