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연구가).

은사운동

1960년대에 미국을 휩쓸었던 은사갱신(Charismatic Renewal)의 운동은 같은 시기에 역시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은사(charismatic)라고 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방언(speaking in other tongues)을 말하는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후부터 은사갱신운동은 1980년대 이후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운동과 함께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에서 매우 강력한 힘이 되어왔다. 한편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주의자들은 언제나 기존 교파와 신학 노선에게 큰 저항을 받곤 했는데, 이는 단지 유럽이나 미국 뿐 아니라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또는 아프리카 어디에서든, 은사운동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는 은사운동은 이미 20세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21세기에 들어선 현재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제 아프리카 또는 멕시코 등지에서는 방언을 말하고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예외적인 일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이러한 은사의 실행은 예전처럼 주로 오순절교회에서만 일어나던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현대 은사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제3의 물결’은, 직접적으로 윔버(John Wimber)와 함께한 풀러(Fuller)신학교의 와그너(Peter Wagner) 교수의 영향 하에서 전 세계적인 파급효과를 나타내었다. 와그너는 윔버를 초빙 강사로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 강의를 개설하였는데, 한때 이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의 수는 800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 강의에서 학생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와그너는 ‘제3의 물결’을 제1기인 1900년 초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이나 제2기인 1960년대 은사갱신운동과는 구별 지었다. ‘제3의 물결’ 운동에서는 오순절주의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를 제2차적인 체험이 아닌 중생 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 후에 나타나는 성령의 충만을 받는 체험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본다. 그리고 방언도 역시 필수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제3의 물결에 가담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개혁주의 신학의 배경을 지닌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의 물결’ 신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레트(David Barrett)의 통계에 의하면 1987년도만 해도 이미 2700만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빈야드 신학(Vineyard Theology)은 또한 많은 부분에 있어서 풀러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래드(George Eldon Ladd)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복음 전파의 용어로서만이 아니라,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존으로 또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빈야드의 능력 대결(Power Encounter) 또는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의 강조가 그 신학적·성서적 기반을 제공받게 된다.

현재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적 교회들이 제3세계 지역 선교와 교회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리 논쟁이나 변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확장된다고 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포위(Karla Poewe)는 오순절적 은사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의 전형적인 모델로서, 한국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심스(John A. Sims)가 지적한 바와 같이 꿈, 환상, 능력 대결, 여러 가지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Holy Spirit) 등의 초자연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은, 다원화 상황 속에서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은사운동은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은 물론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교회들과 개혁파 교회들 속에도 예외 없이 큰 영향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초교파적으로 거의 보편화된 현재의 상황이다. 그런데 은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나 무분별한 은사 사용은 언제나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므로, 이 점에 있어서 은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상호 이해와 사랑의 정신 속에서 복음적인 은사 사용의 잣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예가 이러한 정신을 서로 나누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에드워즈를 인용하는 은사주의자들

빈야드운동의 대변자들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부흥운동과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의 육체적 나타남(physical manifestations)의 현상들을 동일시하여 이를 합리화하려는 경향들이 있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Toronto Airport Vineyard)의 한 목사인 세브류(Guy Chevreau)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브류는 에드워즈가 자신이 받은 청교도적 전통과는 달리 로크(Locke)의 영감을 따라 청교도적 기능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정신과 이성의 기능에 강조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체험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의 「종교적 감동들」(Religious Affections)을 썼을 때, 그가 말하는 참된 신앙이란 메마른 정통이나 이성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마치 에드워즈가 토론토 축복의 전형적인 모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말한 감동적 경험이란 단지 어떤 죄인이 회심하게 될 때의 드라마틱한 변화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웃고, 실신하고, 구르는 등의 행위를 열광주의로 간주하는 에드워즈가 과연 토론토 축복의 육체적 나타남의 현상들을 옹호할 것이란 말인가?

에드워즈는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육체적 나타남의 현상이 제아무리 예언적 환상을 가져오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들은 참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참된 거룩한 은총은 일반적인 은사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신자들은 이 같은 기적적인 은사들을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에드워즈는 기적적 은사들은 이미 1세기에 끝났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초자연적 은사들은 성령의 열매들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은사들이 종말론적 현상이나 교회의 갱신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았다. 에드워즈는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해 논하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참된 갱신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열광주의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타락이라고 보았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그의 교훈은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에게도 늘 귀담아 들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특히 은사주의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신학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을 왜곡되게 인용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대화의 길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지닌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이 비록 에드워즈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으나, 적어도 에드워즈의 강조는 은사 체험보다는 회심 사건에, 그리고 육감적인 신앙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계시에 더욱 강조점을 두는 복음주의의 일반적인 노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복음주의자들은 이미 흔들리지 않는 복음주의의 정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복음주의자들은 다양한 은사 활용에 있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에드워즈의 예는 적어도 현대교회의 은사주의자들이 영성운동에 있어서 지켜 나가야 할 잣대(canon)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은사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주류에게 외면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영성운동에 있어서 복음주의자들을 끌어안고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신학적 정신이 필요한지를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변함없는 복음주의의 튼튼한 기초, 즉 주관적 체험보다는 객관적 계시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육감적 체험과 초자연적 은사의 현현보다는 영혼의 변화에 핵심 가치를 두고 사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