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예배이다. “예배에 목숨을 걸라”면서 예배 중심적인 신앙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하나같이 열광적이고, 예배에서 감동을 주려 하고, 새로운 도전과 퍼포먼스로 강단을 장식하고 창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고급스럽고, 아름답고, 웅장하고, 거룩한 것 같고, 성도들도 매우 그렇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예배에서 희열이나 감동을 느끼면서 교회의 벽 뒤에 숨어 조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도전받고 결단하고, 그리고 웃으면서 교회 문을 나서서 헤어지면 그것으로 신앙생활의 본분은 다 감당한 것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면서 어떻게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행사할까는 생각지 못한다.

목회자들은 그저 좋은 예배를 인도하여 사람들로 예배실이 가득 차면,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가 풍성하게 하면, 그것으로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지기 때문은 아닐까? 예배에 은혜받고 감격하는 이들도 사실 잘 살펴보면 리드하는 그룹들일까?!

몇 사람이 눈물 흘리고 감동을 받는다고 그것을 전체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감동과 은혜가 어떻다는 것인가? 자기 혼자만의 감동이 무엇이란 말인가? 예배자가 세상을 향한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이나 소금과 빛의 사명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오직 교회 안에서 자기만 만족하면 되는 식의 예배가 아닌가?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관심도 없는, 교회 안에서의 헌신이나 봉사만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나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처소에서 기다리지 않으신다. 거리로 옮겨진 시궁창의 제단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예배에 안주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쉽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감정적·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고, 종교적으로 의무감을 완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현대판 고르반의 행위로 머물 수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유난히 예배를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고, 예배당을 분위기 있게 만들고, 영상이나 음향기기에 수천만 원씩 투자하는 것은, 그만큼 종교적인 행위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예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것이 맞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 더 세상을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드러내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외면하면, 그 예배는 차라리 강조하지 않는 것이 났다.

레위기에서는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의 예배가 거부당하여, 예배 중에 불덩어리가 떨어져 그들이 즉사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라기에서는 예배를 거부하면서 성전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너희들 얼굴에 똥을 발라 버리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예배만 즐기는 행위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예배에 대하여 책망하신 경우가 많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의 태도를 책망하신 것이고, 예배가 형식적이고 의무적이고 자기 만족감으로 넘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예배지향적인 교회 안에 갇혀버린 신앙을 중시하다 보니, 현실을 망각하고 선교에 대한 이해도 지극히 수동적이 되어 버린다.

신앙인의 예배란 어느 부분에서 선교로 나가기 위한 예비 작업이다. 내 삶의 현장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하나님나라 확장을 하려 할 때에 담대함과 능력을 얻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나가기 위한 작업이다. 예배의 형태가 교회 안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데서, 이제는 세상을 향한 삶으로 행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구약의 예배는 이미 갇혀 있는 공간을 벗어나서 삶 속에 나타나는 패러다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유통망이다. 세계교회는 월마트, 맥도날드, 스타벅스를 합한 것보다 많다. 교회는 어떤 조직보다 200년 앞서 세계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귀하를 전 세계에 분포된 수천 개의 마을에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기관은 교회 뿐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는, 예배만 중시하는 태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실제적인 사역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일정한 헌금 후원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그것은 선교부 회계가 은행으로 자동이체시켜 놓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한 식의 선교 동참은 많은 경우 가식적인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엄청난 양극화를 불러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뒤를 돌아보면 어두운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이들을 향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연구하여 교회 전도·선교기관들이 외부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될 것이다. 역동적인 성도를 만드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다.

또한 한두 명의 인도자가 예배 전체를 독점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찬양하고, 우리의 삶 속의 실패와 승리를 나누고 기도하는 교제요 위로가 아닌가?

러시아교회는 예배 중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나누는 일이 많다. 그리고 예배 중에 병든 자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세상을 염려하며 기도하는 일들이 항상 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더 구체적으로 나누고 기도한다. 한두 명이 독차지하고 인도해가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자가 구경꾼이 되는 것을 막고,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겨우 예배만 하고 혹은 설교만 듣고 돌아서는 것으로 인식시킨다든지 습관화시켜서, 교회가 생동감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은혜로 처리하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인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행정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만큼 능력을 발휘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에 원동력이 되는 사회기관은 없다고 본다. 지도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러한 일에 교회가 헌신한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부흥을 이루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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