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2. 성모 마리아 숭배

우리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 때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호칭하게 됨을 기초로, 중세 교황들의 교령과 선언에 의해 전진적으로 숭배와 찬양 대상이 된 마리아는 현대까지 더욱 확고하게 가톨릭 신도의 우상이 되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바티칸은 마리아 숭배를 급속히 강화하여 1854년부터 100년간을 ‘마리아의 세기(Marian Center)’라 부르고, 우리 시대는 ‘마리아의 시대’로 부른다고 고백한다. 1854년 피우스 9세에 의해서 마리아의 무죄 잉태설이 결정되었다.

『가톨릭 교리서』도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 없이 깨끗하게 보호하셨다”고 가르치고, 제2 바티칸 공의회서는 마리아 종신처녀설(영원한 동정녀)까지 선포하였다. 또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부르도록 하였다. 제2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은 성모 마리아에 대해 “하느님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모친이신 마리아”로 고백하며, 마리아는 온전히 거룩하고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마리아는 부활 승천하여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되었다고 고백한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마리아가 원죄와 개인죄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벗어났다는 것은 이미 중세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언하였다. 이러한 마리아론은 곧장 인류구원론과 연결된다. 『가톨릭 교리 사전』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마리아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인류를 구원하였다고 하며, 마리아 공경은 그리스도의 강림이 계획된 것같이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해서 계획되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가톨릭교회는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한 마리아의 부활·승천설을 전제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며 공경하는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 가나 혼인잔치(요 2:1-8)에서 그 어머니의 요청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과 같이, 마리아에게는 이러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신도는 그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빌어 달라”는 내용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도는 마리아를 ‘전 인류의 어머니’이자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요 19:25-27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리서』는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섬기는 이유를 설명하며, 마리아는 아들과 함께 고통을 받은 구세주의 어머니이므로 우리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마리아는 죄가 없어 하늘에 올라가 천상과 지상에 모후가 되셨고, 어머니인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봐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와 같은 가톨릭적 마리아론에 대해 통찰력 있게 간파해야 할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성모 마리아의 청을 들어주셔서 행하신 기적과, 십자가 상의 예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효심에 관해서, 우리는 가톨릭교회에서와 같이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에는 마리아 숭배와 대치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자마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막 3:33-35)고 하시며, 오히려 그 둘러앉은 자들을 향해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라고 칭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초인간으로 숭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티칸이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또는 ‘교회의 어머니’로 호칭함으로, 20세기 마리아 숭배는 본격화되었다. 교황 피우스 12세는 1942년 10월 31일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온 세계를 봉헌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21일 제2 바티칸 공의회 중 ‘마리아의 티 없는 성심께’ 다시 새롭게 온 세계를 봉헌하였다. 그 때 교황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호칭하게 했던 것이다. 교황청에서 이러한 결정을 한 동기는 뒤에 논하게 된다.

1917년 5월 교황 베네딕트 1세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해서 온다”고 선언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성경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요 14:13f.) 말씀을 제쳐놓고, 기도는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 전달될 때 가장 효과적이고, “우리는 예수께 직접 부탁할 수 없다”고까지 가르친다.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모든 구원의 은총을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통해서 받도록 한다.

덕분에 일반적으로 현대 가톨릭 신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교제나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를 물으면 오히려 “죽어봐야 알죠”라고 대답한다. 이 얼마나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한 구원 사실을 불신하며, 그 영혼이 준비되지 못한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 극진한 사랑과 구원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1950년 11월 1일에는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 승천설을 규정하였다. 마리아는 죄 없이 태어나고 죄 없이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부활 승천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8월 15일을 ‘마리아의 부활 승천 기념일’로 정하였다. 금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바로 8월 15일에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렇게 마리아 숭배는 20세기에 더욱 급진적으로 강화되었다.

현대 가톨릭의 상징적인 신학자 칼 라너는 마리아를 “성인의 통교 안에서 우리 모두의 전구자이고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고 하며, 주님을 통해서 그녀가 얻은 은총을 베풀어 줌으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아래와 같이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전구자, 우리의 변호자시여, 우리를 당신 아드님과 화해시키시고, 이제와 이생이 끝날 때 당신 태중의 복되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이제와 우리 중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을 변호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유일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제62항은 ‘천상에서 계속되는 마리아의 모성’에서 마리아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고 부른다. 『마리아교리 문답』집도 마리아의 중재사역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온다’고 가르친다. 마리아는 그의 모성적 사랑으로 우리가 천상가정에 들어갈 때까지 지상에 있는 우리를 돌봐 주신다고 한다. 제 2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마리아 숭배 신앙이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변호하며, 교회는 주저함 없이 이와 같은 마리아의 종속적 역할을 체험하며 이러한 모성적 보호를 통해 구세주께 보다 깊이 결합되도록 권고하고 있다.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제66항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고 공경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와 같은 마리아 공경은 성자가 성부와 성신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리아 숭배에 대한 비판자들을 의식하여 변호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톨릭도 우리의 구원자가 예수님 한 분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 홀로 구원의 공로를 세웠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마리아를 ‘중재자’라 함은 “마리아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시고”, 천국으로 가기 위한 ‘다리’인 예수님을 잘 사용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며, 성모 마리아가 우리 영혼을 위해 기도로 우리가 필요한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준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 대해서는 최대의 공경을 의미하는 흠숭(latr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마리아를 공경할 때는 가장 위대한 사람을 공경할 때 쓰는 상경(hyper-dulia), 그리고 성인들은 공경(dulia)이라는 단어로 구별하여 칭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죽은 영혼들 간의 이러한 등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가톨릭 신도의 기도 대상들이다.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 신앙을 극단적으로 부추기는 힘은 ‘마리아의 현현’ 신앙이다. 가톨릭교회는 2월 11일을 ‘루르드의 성모 기념일’로 지킨다. 루르드는 불란서 남방 피레네 산기슭의 한 작은 마을인데, 바로 이곳에서 1858년 2월 11일에 13살의 소녀 베르나데타에게 마리아가 흰 옷을 입고 묵주를 가지고 나타나서 맨발로 장미꽃 두 송이를 밟고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나데타는 그에게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가톨릭교회는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바치게 되었다. ‘묵주기도’ 즉 로사리오 기도란 장미꽃을 기원으로 하여 성모에게 장미 꽃다발을 바친다는 의미라고 한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13세기 마리아가 도미니칸 신도에게 나타나서, 당시 ‘알비파’라는 이단을 없애려는 무기로 묵주를 주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로자리오는 150개의 구슬 15단으로 구성되었다. 로사리오 기도를 하면서 15단을 다 마치면 성모송을 150번 부르게 된다. 즉, 묵주알을 하나씩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성모에게 바치고, 중간 크기의 묵주알을 잡고 영광송을 바친다.『마리아교리 문답』집은 ‘로사리오 기도’가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가르치고, 묵주는 성모 마리아의 눈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의 환희와 고통과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리아에게 로사리오를 자주 바칠 것을 권하였다.

‘갈멜산의 동정 성 마리아’ 기념일은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제정한 것이다. 이유는 갈멜산 수도원 수도사 시몬 스톡에게 1251년 7월 16일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성의를 주면서, 이 옷을 입고 살면 죽어서 영원한 불에 탐을 면하리라고 약속하였다는 환상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매년 7월 16일에 ‘갈멜산의 동정 성 마리아’를 기념한다. 20세기 초 교황 피우스 10세(1903-1914)는 가르멜 성모가 지시한 대로 갈색 옷 조각 스카플라를 착용하고 살았고, 교황 피우스 12세(1939-1958)는 ‘스카플라’를 착용하는 의미는 “마리아에게 우리 자신을 봉헌한 표시가 된다”고 하였다. 『마리아교리 문답』집은 스카플라 착용의 의미를 우리를 마리아에게 봉헌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지만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마리아의 양자가 된 표시”라고 설명하였다.

갈멜 수도사들은 물론이고, 교황 피우스 10세와 피우스 12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양자됨이 부족해 마리아의 양자됨을 택했다니 이 어찌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그 속죄 사역은 어디로 가버리고, 갈색 옷 한 장을 걸치고 살면 구원받는다는 ‘자칭 마리아’를 따라가며 그의 양자가 되어 구원받기를 희망하겠는가? 이 자칭 마리아는 무슨 속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대신, 자기가 준 갈색 옷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양자들을 자기의 양자들로 가로채는 것일까?

마리아 현현에 관한 또 다른 주장이 있다. 포르투갈의 산골 파티마에서 1917년 5월 13일에 태양보다 더 찬란한 광채 가운데, 양치기 어린 소년들에게 한 부인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 부인은 양치기 소년들에게 항상 로사리오의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게 하였고, 매월 13일 같은 장소로 오게 하고 그 때마다 자기를 나타냈다고 한다. 10월 13일 그녀의 마지막 발현 일에는 푸른 망토를 입고, 아기 예수와 그 남편 요셉은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때서야 그 부인은 자신이 ‘로사리오의 성모’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칭 성모는 온 군중에게 로사리오의 기도를 할 것을 명하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내 하자 없는 성심공경을 수립하기를 원하셨다”고 하면서 “러시아를 내 하자 없는 성심에 봉헌하고 다섯 달 동안 매월 첫 토요일에 영성체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그릇된 주의를 세상에 퍼뜨릴 것이고 전쟁을 일으키며 성교회를 박해할 것이니, 착한 사람은 치명할 것이며 교황은 많은 곤란을 당할 것이며 여러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 교황은 나에게 러시아를 봉헌할 것이니 그는 회개할 것이고, 한때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1942년 10월 30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주교좌 대성당에서, 전국 모든 주교와 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 특사의 집전으로 온 세계와 러시아를 성모께 봉헌하는 장엄한 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위와 같이 ‘파티마의 발현 성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인 러시아를 자기 하자 없는 성심에 봉헌하게 하고 자기를 숭배하게 하였다. 이때(1942년) 나타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만왕의 왕이 아니라, 2000년 전과 같이 여전히 마리아의 품에 안긴 힘없는 아기다. 가르멜 수도원의 예수님은 엄마 품에 안긴 힘없는 아기였으며, 영원히 자라나지 않는 아기로 남아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는 모든 신도의 기도와 찬양을 받고, 교황에게서 러시아와 온 땅의 통치권을 받아내었다. 교황청이 러시아와 온 세계를 마리아의 손에 바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1942년에 온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에서 벗어나서 마리아의 수하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마 28:18, 빌 2:9f. 단 7:13f.)인 이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고, 교황은 언제부터 이 땅의 통치권을 소유했으며, 이 땅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마 28:18, 요 5: 5:27, 빌 2:5-11)에서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마리아에게 바칠 수 있었겠는가? 파티마에 나타난 자칭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의 영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니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5-8)”.

성경이 구원의 척도가 되지 않고, 환상이나 꿈이 신앙과 진리의 척도가 되는 일은 얼마나 혼돈스러운가? 위와 같은 마리아 숭배 신앙은 상상을 초월하게 심각하고 위험스럽다. 이 모든 가톨릭 신앙 형태와 마리아 신앙이 어찌 강령술(spiritism)적 현상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죽은 자의 발현설과 같은 현상은 샤머니즘(spiritism) 문화권에서 흔한 일이다. 실로 거의 모든 무당들과 이단들이 이러한 환상이나 꿈과 비슷한 신비체험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와 병행하는 신비체험이 없는 무당은 무능하고, 한국에서는 이를 ‘선무당’이라 부른다. 가톨릭교회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개인적 체험을 판단하는 기준을 성경에 두지 않고, 오히려 교황의 선언에 두었다. 가톨릭교회는 환상이나 꿈이 어디로부터인지, 하나님에게서인지 또는 악한 영에게서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회의에서 결정한다. 진리의 척도가 성경적 기초에 있지 않고, 신비체험과 인간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될 때의 그 위험성이 얼마나 크고, 영적 분별력을 파괴하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이와 같이 마리아 숭배를 합리화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은총의 중재자로 여긴다고 고백하며 성모 마리아를 보조적인 은총의 중재자로 고백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위치를 정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신앙에 행4;12은 경고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위와 같이 성경은 은총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어떤 피조물도 살아서든 죽어서든 하나님의 은총의 대라자나 협력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실 『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도 제8장 53항에서 성모 마리아도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나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미리아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아담 혈통에 결합되어 계실 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

이는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같은 문헌 같은 장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에서, 한편으로는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은’ 동정녀로 묘사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아담의 혈통이라고 고백한다. 사실상 마리아도 원죄성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타락한 피조물에 속했다. 그 또한 오순절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고(행 1:13f, 2:1-4).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성모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처럼 변화를 받은 새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구원 중재자가 될 수 없고, 그녀 자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일 뿐이다.

성경은 성모 마리아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다(왕상 8;46. 전 7:20. 요일 1:9f. 롬 3:9f. 23). 예수 그리스도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고, 그 외에는 성모 마리아를 포함하여 흙에 속한 피조물들은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부활하게 될 것을 알리고 있다(고전 15:20-23). 성경은 성모 마리아를 부활시켰다거나 승천시켰다고 하지 않는다. 또 마리아를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원죄 없는 의인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오히려 성모 마리아보다도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말씀하셨다(마 11:11). 그리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확언한다(롬 3:9f.). 성경은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부활 승천설은 성경적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와는 관계가 없고, 20세기 전후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 숭배용’으로 만든 창작품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단언한다(요 3:13).

모든 중재와 은혜와 사랑과 평강은 마리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것이지(롬 5:5), 마리아가 예수님께 구해서 얻어 주는 것이 아니다. 희락과 화평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사지, 마리아가 주는 은사가 아니다(요 14:27). 가톨릭 신학도 오순절에 내려오신 성령은 이미 성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요 14:16f.). 그러므로 성령과 성도 사이의 친밀성보다 더 친밀한 사이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마리아는 성령처럼 사람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다. 만일 마리아의 영혼이 성령처럼 신도에게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런 신도를 ‘무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가톨릭신도는 왜 하나님보다 죽은 마리아를 더 친근하게 대하는 걸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역시 마리아를 통해서 할 것을 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기도는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명하셨고, 그리하면 들어주시리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약속이 사실이라는 체험은 교회사를 통해서 무수히 증거되어 왔다.

가톨릭은 기독교로 자처하면서 왜 죽은 영혼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일까? 오직 성경은 우리를 위한 참 도우미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παρακλήτος)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παρακλήτος)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를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우리의 도우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성령인 보혜사이다. 예수님은 성도들과 신랑 관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우상에 해당된다. 이 보혜사 παρακλήτος는 요한복음 14장 이하에서 “보혜사”로, 요일 1:2에서 대언자로 번역되었으나 희랍어 성경 단어로는 같은 단어인 παρακλήτος, ‘도우미’ 또는 ‘변호사’를 뜻한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께 직고하도록 가르친다(롬 14:11f.)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f.)”.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층만하리라(요 16:24)”.

그러나 가톨릭은 다른 성도와 똑같이 죽어 장사된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더욱 가까이 한다. 그러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가 우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부딪힌다. 그 대답은 가톨릭 성도가 마리아와 관계가 더 친밀한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 친밀한지에 달려 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영적으로 신부와 신랑의 관계이므로 성모 마리아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4f.)”.

그러므로 가톨릭 신도는 그들이 신봉하는 마리아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도우미인지 방해물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도와주시는 이도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우리 성도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확실하게 경험해 왔다.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 신앙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의 ‘신랑’과 구원자와 도우미(마 25:1-10, 막 2:19f.)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평생을 2000년 전 죽은 마리아에게 집중하며 살아가게 한다. 가톨릭 신도들은 예수께 직접 달려가지 못하고 마리아를 거쳐 가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예수보다는 마리아와 더 가깝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은 예수께서 친히 하실 일들을 죽은 마리아에게 돌렸다. 더구나 성경이 부활했다고 가르친 일이 없는 죽은 마리아를 섬기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귀신과 교제하는 자들(고전 10:20)’이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 말씀과 같이 누구든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저절로 예수님과의 친밀성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가톨릭교회 성도는 왜 직접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마리아와 무수한 죽은 ‘성인들’과 천사들을 통해 예수께 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성경에 약속한 모든 말씀들을 믿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는 가장 귀하고 복된 사람들이다(요 14:16f, 롬 5:18f.). <계속>

/이동주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은퇴, 현 선교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