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가 13일 오후 8시 ‘인문학으로 찾는 신(3): 하인리히 하이네, 신들의 황혼’을 주제로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 강연을 펼쳤다.

독일의 시인이자 정치인, 저널리스트였던 하인리히 하이네(Harry Heine, 1797-1856)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법학박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취직하지 못했고,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를 동경해 파리로 이주, 빅토르 위고와 알렉산드르 뒤마, 칼 마르크스 등과 교유하며 무신론자·합리적 근대 자유주의자로 ‘이상적 사회주의’를 꿈꿨다. 그러나 만년에 <로만체로>를 쓰며 ‘히브리의 신(하나님)’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로렐라이 언덕과 같아

‘시인 하이네: 사랑, 혁명, 그리고 신’이라는 제목 아래 이 박사는, 가곡으로 잘 알려진 하이네의 시 ‘로렐라이 언덕’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30대 후반에 독일 정부의 초청을 받아 로렐라이 언덕을 가 봤더니, 강원도의 명산들이나 부여의 낙화암보다도 볼품이 없었다는 것. 그는 “그때 노래와 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느꼈다”며 “고국의 땅은 금수강산이지만, 시가 없고 작곡가가 없기 때문에 생각하면서 부를 ‘장소’가 없다”고 했다.

머나먼 타향의 ‘로렐라이 언덕’을 부르면 고향이 생각나듯, 우리에게는 그곳에 가면 가슴이 설레는 공간이 있다. 이를 ‘토포필리아’라고 하며, 각자의 고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음악과 시의 힘은 ‘팩트(fact)’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우리가 믿는 종교도 로렐라이 언덕 같은 것으로, 제가 늘 말했던 영성,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팩트만 따지다 꿈도 사랑도 잃어버렸고, 과학이 종교가 되어 비합리적·비이성적인 것은 창피하고 숨어서 해야 하는 것처럼 됐다”고도 했다.

▲라인강변의 로렐라이 언덕. ‘요정의 바위’라는 뜻의 로렐라이는 라인강 중류 강기슭 큰 바위의 이름으로, 튀어나온 지형 때문에 침몰 사고가 많았다. 이와 관련, 뱃사람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도취돼 바라보는 동안 배가 물결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혀 난파한다는 설화가 있다. ⓒ독일관광청 제공

무신론자 하이네가 마지막으로 본 건 정의의 배신
밀로의 비너스상, 美의 전형이나 끌어안을 수 없어

이어령 박사는 “그렇게 무신론자이자 합리적 근대 자유주의자였던 하이네가 마지막에 본 것은, 역사와 정의, 팩트 등이 그를 배신했던 것”이라며 “그는 젊은 시절 썼던 낭만시들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산문을 쓰며 혁명을 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때까지 그에게 효자 노릇을 한 것은 그 낭만시들이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이는 진리(眞)도, 착함(善)도 아닌 미(美)의 세계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것”이라며 “그러나 ‘미’는 천사에게도 있지만 악마에게도 있는 것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에 대해 ‘천사와 악마가 결투하는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고 했다. 그 아름다움이 천사와 악마 중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는 5년 전인 2010년 4월 ‘지성과 영성의 만남’ 첫 강연에서도 하이네의 ‘신들의 황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우리는 독일 시인 하이네가 노래했듯 빛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닌, 대낮도 아니고 한밤도 아닌 저녁 황혼에 침대 위에서 누워 있는 마취 환자처럼 어렴풋한 상황에 있다”며 “하이네는 그리스의 신들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그 신들은 인간들처럼 같이 울어주고 슬퍼해줄 수는 있어도 두 팔을 뻗어 우리를 끌어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두 팔을 뻗을 수 없다’는 것은 美의 전형이나 두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아프로디테)상’을 말한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이와 관련해 “팔이 없어 끌어안을 수 없는 희랍의 신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했다. 또 “문학도 인생도, 결여된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움으로써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지, 완전히 가시화된 것은 의미가 없다”며 “결여를 채우는 상상력, 마음 속에서 채워가는 그것이 의미의 세계이자 기도의 세계”라고 했다.

▲지난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양화진 목요강좌가 진행 중이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경쟁력 없는 이들에게는 생존력이 있더라
갈구해 보지 않은 자가 하나님을 알겠는가

그는 “제가 발견한 최고의 진리는 경쟁력 없는 이들에게는 생존력이 있다는 것”이라며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생존력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남을 잡아먹지 않는 바퀴벌레가 지구 멸망에도 가장 오래 살아남거나 한국 사람들이 사막에 갖다놔도 잘 적응하듯, 경쟁력이 없은 존재들은 생존력이 기가 막힌다”고도 했다.

이어령 박사는 마지막으로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어렵게 구도의 길을 찾아간다”며 “목마르지 않은 자가 물 맛을 알겠는가? 갈구해 보지 못한 자가 하나님에 대해 알겠는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편하기 위해 교회를 찾거나, 내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며 “그 많은 고통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마지막 묻힐 곳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에 시편 137편에서 기자가 예루살렘을 잊지 못하듯 절실히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예수님도 썩고 문드러지고 영생하지 못하는 육체를 우리와 같이 타고 나셨지만, 마지막 십자가에서 육체를 넘어서지 않으셨느냐”며 “피를 가진 이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겪는 고통을 예수님도 같이 겪으셨기 때문에 내 고통 옆에는 그분이 계시는 것이다. 나는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없지만 그가 있기에, 그가 걸어간 발자국이 있기에 나는 흉내라도 내면서 서툰 시를 쓰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혹시 저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오른손을 쓰지 못할지라도 보석함에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새겨 두라”며 “아는 사람이 탐낼지도 모르니 열쇠로 꼭 잠가 두시고, 긴요할 때 열어 보시라”고 덧붙였다.

▲이어령 박사의 지난 9월 강연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어령 박사, 목요강좌서 5년간 총 32차례 강연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는 이날 강연으로 지난 5년간의 목요강좌 활동을 마무리했다. 이어령 박사는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가 시작된 지난 2010년부터 이날까지 5년간 총 32회의 강연을 했으며, 이재철 목사와의 대담이 22회, 단독 문학강독이 10회였다.

이어령 박사는 이날 강연 후 “오랜 기간 함께 목요일마다 행복했던 시간을 지내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제 제 나이도 그렇고 앞으로 만날 시간이 많지 않겠지만, 아까 말한 보석상자를 여러분이 갖고 있는 한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마지막 강연에는 이재철 목사도 참석했으며, 양화진문화원 측은 이어령 박사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증정했다.

이 박사는 2010년 3월 개막강연 ‘소월은 왜 강변에 살자고 했나: 김소월의 시로 본 한국 문화와 기독교’를 시작으로 그 해 이재철 목사와 함께 8차례의 ‘지성과 영성의 만남’으로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4월부터 매달 삶과 가족, 교육, 사회, 경제, 정치, 세계, 문화, 종교 등을 놓고 대담을 펼쳤다.

2011년에는 이재철 목사의 ‘안식월’로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 탕자의 비유, 달리다굼, 말씀과 빵을 주제로 ‘문화로 성경 읽기’ 대담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성서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다윗, 솔로몬, 아담, 가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야곱 등 7차례 이재철 목사의 질문에 답했다.

2013년부터는 이재철 목사의 건강 문제로 이어령 박사의 문학 강독이 마련됐다. ‘소설로 찾는 영성의 순례’로 <레미제라블: 혁명이냐 사랑이냐>, <말테의 수기: 생명찾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생의 길을 묻다>, <탕자, 돌아오다>, <파이 이야기> 등 5개의 작품을 다뤘다. 2014년에는 6월부터 ‘인문학으로 찾는 신’을 주제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니체의 ‘신은 죽었다’, 카프카의 <변신>, 마지막 강연인 <신들의 황혼>을 각각 분석했다.

그해 3-5월에는 이재철 목사와의 세 차례 ‘인생 대담’을 통해 <우상의 파괴>, <장군의 수염> 등 이어령 박사의 작품세계와 당대의 이 박사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도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