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박사.

서론

교회가 같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고 온 교회에 평화가 이뤄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 통합을 희망해, 2013년 제10차 WCC 총회가 마무리된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금년 5월 2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와 함께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이하 한국신앙직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는 7월 31일 제1차 신학위원회를 열고, ‘정례 신학자 모임’에 대해서와 ‘에큐메니칼 강좌 개설’과 ‘성경과 교부들에 관한 공동 연구’ 등에 관해서 제안하였다.

작년 제10차 WCC 부산총회 개최로 말미암아 WCC와 가톨릭의 관계는 더욱 깊게 결합되고, 금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더욱 굳게 손잡은 WCC를 통하여 우리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기에, 필자는 가톨릭 신학과 예배와 신앙 형태 등의 제 문제들에 관해 신중하게 검토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경전이 우리 개신교회의 경전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고, 우리와 공통 신앙고백과 의식도 다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톨릭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해야 하고, 우리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와 함께, 그리고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지 잘 알아야 하므로, 가톨릭교회의 몇 가지 독특한 신앙적 특성들을 파악하고 우리의 경전인 성경에 비추어 평가하고자 한다.

개신교회의 진리의 척도는 오직 66권의 성경전서이며, 기독교 역사상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에 단 한 자도 가하거나 감하지 않았다. 개신교회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충분한 표준과 척도로 믿고 있다. 성경의 경전성은 사도성과 그리스도 중심성, 성경의 자증성에 근거하고 있다. 개신교에서 전통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와(고전 3:11)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에서(엡 2:20), 기록된 성경말씀을 진리로 보존하고 사실로 체험하고 동의해 온 교회사적 실제이다. 그러므로 개신교회는 이 성경적 전통에 가하거나 감하여 만들어진 신앙고백이나 신앙의 형태들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전통이라는 두 개의 바탕 위에 서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종교개혁가들에게 대항해 성경과 전통 둘 다를 ‘신앙의 근원’으로 결정하였다. 가톨릭의 구약성경에는 개신교의 것보다 7권 내지 9권의 외경이 더 포함되어 있다. 그 외경들은 정치역사서 및 지혜문서들이며, 그 외경들의 이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 상권과 하권, 지혜서, 집회서, 그리고 예레미아 선지자의 제자가 쓴 바룩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 마카베오 제 3권과 4권을 더하는 수가 있다. 이 외경들은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경전으로 채택된 것들이다.

신약성경은 가톨릭과 우리의 것이 내용이 같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문서 수효 차이가 생긴 것은, 개신교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번역을 하였고 가톨릭은 셉투아긴타(70인역성서)에서 번역을 한 데 있다. 셉투아긴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의 번역가들이 구약을 그리스어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위의 외경들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 Vulgate는 제롬(Jerome, 331-420)에 의해서 그리스어 성경인 ‘셉투아긴타’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이다. 제롬은 392년 이전에 히브리어 구약에서 구약을 번역하였으므로 외경이 제외되었었는데, 후에 셉투아긴타에서 구약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는 입장을 좀 완화하여, 교회가 외경을 읽을 수는 있으나 교리를 위해 읽지는 말 것을 권했다고 한다. 제롬은 유대인들이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 공의회 헌장과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교황이 발표한 교령과 선언문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이해되며, 이 전통들이 성경 말씀과 대치될 경우에는 -개신교와는 상반되게- 항상 전통을 선택한다. 즉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전통에 의해서 세워진다.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제8항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기초는 교회의 전통이 ‘영원한 진리의 기둥과 기초’(딤전 3:16)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바탕에서 만들어진 가톨릭의 독특한 전통들이, 바로 성경만을 신앙의 토대로 삼고 있는 개신교회 신앙과 신학에 대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WCC와 가톨릭이 함께 현대 종교통합 운동을 펼쳐나가지만, 이 둘의 연합이 성사되려면 WCC는 가톨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용해야 할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필자가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연구하게 된 동기는 가톨릭교회 신앙과 구원 문제에 참견하고자 함이 아니고, 우리 개신교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진리를 명백히 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와 타종교들과 종교연합을 추구하면서 제시하는 가톨릭교회 전통에서 발생한 가톨릭 신앙적 교리 네 가지: 1. 미사와 화체설, 2. 성모 마리아 숭배, 3. 연옥과 성인의 통공, 4. 교황 중심적 흡수통합 등에 관해 연구하고자 한다.

1. 미사와 화체설

가톨릭의 화체설은 성경이나 사도들의 전승에 의한 것이 아니라, 1213년 중세 라테란 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다. 화체설이란 최후의 만찬 때 예수께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빵을 기념하는 사제가, 미사 때 예수님의 몸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면, 그 즉시 그 빵이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용 빵은 성찬식 때마다 그리스도가 반복적으로 희생제물이 되어서 현재하는 장소가 된다. ‘화체’란 “성만찬을 통해 빵과 포두주의 본질이 그 외형은 그대로 유지된 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며, 라테란 회의는 이러한 기적이 “정당하게 서임된 사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화체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몇 가지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첫째는 최후의 만찬 때 두 분의 그리스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던 날 “이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화체설로 인해 그 현장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빵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는 내 몸이라”고 하시는 명사문장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흔한 비유적 표현으로써, ‘나는 문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우리가 포도나무를 예수님으로 경배할 것이며, 길을 예수님으로 경배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대로 화체설로 믿으면, 성찬식의 빵과 그 때 남은 빵 부스러기를 예수님이라고 경외하게 되고 미신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친히 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고전 11:24)”였지, 그 빵을 예수님이 되게 해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 빵이 몸으로 변하는 ‘마술 같은’ 일은 일어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빵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지 않았고, 다만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 성찬식을 행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후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큰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가시적인 복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화체설은 잘못된 해석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마실 때마다 기념하라는 잔은 사제 자신만 마시고, 거의 모든 교회에서 신도에게는 분잔조차 하지 않는다. 평신도는 1414년 콘스탄스 공회 때부터 미사 시간에 잔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f.)”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포도주일 수도 있고 포도즙일 수도 있다. 성경은 이 잔의  내용물을 포도나무에서 난 것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 잔은 구약적 희생제인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고, 예수께서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새 언약의 피로써(눅 22;20, 고전 11:25, 히 9:12.15.) 세운 잔이다. 이 잔을 우리는 주님께 받아 마시며,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념하며 후대에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해 달라고 하시던 성찬 내용물 중에 ‘빵’과 ‘잔’에는 인간이 더하거나 덜할 것이 없다. 희생제물을 의미하는 성친식의 빵과 ‘새 언약의 피’를 의미하는 이 ‘잔’을 나누는 것은, 죄 사함을 의미하는 성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히 9:12-22).

필자는 금년 8월 16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미사’를 거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는 포도주 잔에 물을 섞고 그 의미를 “그리스도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섞는 의식”이라 설명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례에 관한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유언은 두 가지 즉, 세례와 성찬이다. 이 중요한 유언을 가톨릭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지 않는 행위는, 필자에게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보인다.

둘째는 반복적인 희생제다. 가톨릭 ‘미사’ 중에 행하는 성찬식은 예수님이 희생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이 사제의 손으로 예수님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린다고 한다.

금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124위 시복미사 시간 중 성찬식 기도 시간에, 교황은 성찬식 빵에 손을 얹고서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아버지께 봉헌하는 이 예물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고서. 저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들어 이 신비를 거행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쪼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도한 바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미사 때마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신부는 성찬식 빵을 거듭 속죄 제물이 되게 한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무한한 가치를 지닌 ‘단 하나의 제사’ 또는 ‘단 한 번의 희생’이라고 하고, 사제가 미사 때마다 이 제사를 되풀이 하는 것은 ‘십자가의 제사와 온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희생제는 단 한 번 뿐이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고, 사제들이 예수님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희생제는 반복적이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완전한 일을 해내겠는가? 가톨릭교회는 성찬식의 의미를 심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가톨릭의 희생제에 관해 정반대로 가르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한 희생제를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 한 번만’이 아니라, 단번에(εφάπαξ, once for all) 이루신 것을 뜻한다(히 9:12, 9:26, 9:28, 10:10-14). 사제가 반복적으로 희생제를 행할 필요가 없음을 확언을 해 주는 요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의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가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1-14).”

NIV는 12절 ‘그리스도는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를 ‘for all time one sacrifice’로, 확실하게 가톨릭의 반복적 희생제사가 그릇되었음을 확언해주고 있다. 사제가 이 말씀을 거스려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은 결코 성경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교회의 창작물이다.

이 같이 가톨릭 신부들이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으로 희생제를 지내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누가 이러한 사제사역을 허락하였는가?

셋째는 빵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감이다.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제3항은 “우리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고전 5:7) 십자가의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동시에 성체성사의 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고 한다. 가톨릭은 성찬식 때 사제의 봉헌에 의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낀다.

16세기 영국 스미트 필드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을 당한 존 브레드포드(John Bradford)에게, 대법관이 한 마지막 질문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믿느냐”는 내용이었다. 물론 개신교의 성만찬 때도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즉 성령의 임재하심을 강력하게 느낀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때 ‘성령의 임재’에 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으나, 아직도 빵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빵의 본래적 요소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임재해 계심을 믿는 것이다.

16세기 순교자 로버트 글로버(Glover)에게 주교는 “영성체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다. 같은 때에(1554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순교자 런던주교 리들리(Nicholas Ridly)와 워세스터(Worcester) 주교 허 라티머(Hugh Latimer)와의 논쟁 테마는 1. “그리스도의 본연의 몸이 봉헌의 날 이후 영성체에 실지로 임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2. 그리스도의 살과 피 외에 거기에 과연 다른 물체가 남는가?” 등이었다. N. 리들리 주교는 “제단의 성찬식에서 신부의 봉헌이 있은 후에도 그리스도의 천성적이고 실제적인 몸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그 후에도 그는 공개적으로 “제단의 영성체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의 물체가 남아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옹호했다.

가톨릭 신도는 성찬식에서 남은 빵 조각과 부스러기도, 몸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빵 조각은 흘리거나 밟으면 절대로 안 된다. 가톨릭 신도는 예수님이 된 것으로 믿는 그 빵 조각에게 기도하고 예배한다. 이를 가톨릭교회는 ‘성체조배’라고 한다. 성체(聖體)란 가톨릭교회에서 성만찬 때 사용된 떡을 말하며, 이 떡이 곧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고, 이 떡을 예배하고 이 떡에게 절하는 것이다. 이 떡에게 절을 하며 복을 비는 것을 ‘성체조배’, ‘성체강복’이라고 한다. 성체조배의 경험에 관해 『가톨릭 교리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 인사드린다는 뜻이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아, 열렬한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내어 사사로이 주님과 대화함을 말한다. 성체 안에서 가장 존귀한 은총의 샘을 발견할 수 있다. 성체조배로 보낸 시간은 일생 중에서 가장 귀하고 유익한 시간이다.’

가톨릭 신도는 성체조배로 느끼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으로 현존하여 계신 길 진리 생명이시며, 또한 감실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성체 안에 숨어계신 예수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립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지금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빵 안에 계신 예수님
미사 때마다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나에게 찾아오심을 잘 알아듣도록 도와 나 자신을 그분께 봉헌할 수 있게 하소서.
성체 안에 영원히 현존해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립시다.

위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매일의 미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고 있다. 화체설은 가톨릭의 핵심 신앙이다. 그러므로 중세기 말과 종교개혁 시대에 화체설에 동의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무수히 희생되었다.

넷째는 사제의 제사장 사역이다. 『제2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silium)’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사(미사)를 제정하였다고 하며,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십자가의 제사를 영속화 하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제를 위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의 몸을 가지고 제사지내라는 명령을 한 일이 없다. 오히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있을 뿐이다(롬 12:1).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제사장 사역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사장’ 사역을 로마서 15장 16절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은혜는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이해하는 제사장 사역은 성찬식 빵을 예수의 몸으로 변화시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일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이방인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게 하는 일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우리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하였다. 베드로는 이 직무를 빵을 예수님의 몸이 되게 하는 직무가 아니라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일이 제사장 사역이라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설명한 바는,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삼으셨는데, 그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교회당은 말씀전파의 중요성으로 인해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하지 않고 강단이라고 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예라고 자처하고 있는 가톨릭 사제들은, 이러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무슨 이상한 의식을 수행하고 있는 걸까?

에베소서 4장 11절에 예수께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셔서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몸 가지고 제사 드리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의 행적을 전파하는 선교와 전도사역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명하시는 예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기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 내지 선교 사역자이다(행 1:8). <계속>

/이동주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은퇴, 현 선교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