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샬롬나비 회장/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성령사역은, 번영과 영광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특징지어진다. 표적과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복음 사역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은사사역자들의 치유사역에서 말씀의 선포와 회개가 등한시되고, 이적과 기사가 주목표로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고난과 자기 헌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점차 변두리로 물러가고, 만병 치유의 하나님만을 부각함으로써 하나님을 질병 치유와 사업 성공의 열쇠로서만 표상하는 점이다. 여기에 물질이 강조되면서, 사역이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장막이 아닌 인간의 장막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다.

1. 왕의 기도론: 입술로 선포되는 하늘나라는 번영의 신학에 편승?

손기철은 『왕의 기도』라는 책에서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 요건, 구체적인 방법, 예문까지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도에는 세 종류, 즉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가 있는데 ‘왕의 기도’는 바로 이 세 번째 기도라고 한다(손기철, 『왕의 기도』, 23-24.). ‘왕의 기도’는 “왕이신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이다(손기철, 『왕의 기도』, 26.). 왕의 기도가 꾸짖고 명령하는 것이라면, 왕의 선포라고 해야지 왜 왕의 기도라고 하는가(현요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20.)? 그가 말하는 “왕의 기도”, 즉 선포는 질병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이나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찾아온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 속에는 질병 치유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는데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선포해도 결국은 낫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병자를 지금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믿고, 담대하게 선포하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선포를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기도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쯧쯔파(chutzpah) 믿음을 가져라”(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14. chutzpah는 Yiddish 말로, 행동에 극단적인 확신을 가진 것을 묘사한다고 한다). 쯧쯔파란 유대인의 민족성인 대담함·뻔뻔함을 뜻한다.

이러한 왕의 기도는 선포하여 낫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미룰 뿐 아니라, 복음 이해를 오로지 병 치유를 통한 이 세상에서의 무병의 삶이라는 기복(祈福)에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손 장로는 낫지 않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불간섭에 대한 십자가 신앙의 의미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질병의 치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속에 이루어지는 신령한 나라다. 질병 치유는 하나님 나라 임재의 징표일 뿐이다. 그런데 손기철은 모든 질병 치유를 선언함으로써, 와그너가 말하는 하나님 통치에 기반한 번영의 신학에 편승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왕의 기도는 와그너의 통치신학에 영향을 받고 있다. 와그너의 통치신학은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kingdom now)에 기초해 있다. 와그너는 그의 저서 곳곳마다 “제2의 사도시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와그너는 『신사도 교회로의 변화』(Changing Church)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이 2001년이 바로 내가 앞에서 제2의 사도시대가 개막된 시점으로 지목한 해다. 나는 신사도적 개혁과 ‘제2의 사도시대’라는 표현을 이 책 전체에서 자주 사용할 것이다. 제2의 사도시대는 과정이 아니라 역사적 시기다. 하나님이 신사도적 개혁을 통해 이루어 오신 일의 결과로 우리는 제2의 사도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다.”(Peter Wagner, Changing Church, California: Regal Books, 2004, 김영우 옮김,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세키나, 2006, 13.). 와그너는 그 근거가 지구촌 곳곳에서 신사도교회가 전통교회를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본다. 와그너는 표적과 기적에 의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본다.

와그너 역시 다가오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제2의 사도시대”라는 말은 위험스러운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현재의 제2의 사도시대는 언제든지 신약의 제1의 사도시대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과 더불어 와그너는 정경적 계시의 차원을 넘어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2. 직통계시의 위험성?

손기철은 치유 사역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고전 12:8)라고 하는 것을 활용한다. 그의 집회에서 “오늘 하나님께서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자매님을 고치십니다. 이쪽 오른쪽 좌석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요,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누군가 앞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환자의 상태에 관하여 초자연적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한다. 이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환자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를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 순간에 오직 그만이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는 자로 나타난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체험담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기도 받으러 나오는데 심중에 “저 사람 폐에 문제가 있다”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그는 그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께서 치유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시는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지찬이나 현요한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 자칫 직통계시를 주장할 위험성이 있다(김지찬, “손기철 장로의 신비주의 은사(치유) 집회, 어떻게 볼 것인가?” 302-308; 현요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22.). 그러한 음성들이 과연 정말 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손기철 자신도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음성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올 수도 있지만, 사탄의 영이나, 사람의 영으로부터도 올 수 있기 때문이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0-91.). 다행히 손기철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음성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88.).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 것이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1.). 영적 사역을 하는 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어서, 자신에게 들려온 내적 음성과 생각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상응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내적 지시에 의한 빌립의 에티오피아 내시 전도(행 8: 29-40), 고넬료의 영적 환상 체험, 고넬료에 관한 베드로의 환상 체험과 고넬료 가정 방문 전도(행 10장), 성령이 바울을 유럽으로 보내심(행 16:6-10) 등에 근거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복음 전도와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이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성은 계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내적 조명이라고 불러야 하며, 이러한 내적 조명은 항상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 참과 거짓이 음미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는 사실은, 사역자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역자가 성령을 임의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단지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쓰러뜨림이 은혜의 수단인가?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가?

손 장로의 치유집회에 가면 참가자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손을 이마에 대거나 손짓만 하여도 사람들이 뒤로 넘어진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토론토 블레싱, 펜사콜라 부흥 등 신사도운동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뒤로 넘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동료 신학자에 의하면, “호주에서 이분의 집회에 참석해 보았는데,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가서 이분이 이마에 손을 대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쓰러지니까 본인도 같이 쓰러졌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목회자는 4-5백명의 출석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부러워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토론토 블레싱에 참석하여 쓰러짐을 경험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본 교회에 돌아와서, 새벽기도 시에 교회 장로와 제직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쓰러뜨리는 안수집회를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교회가 부흥이 된 것이 아니라 은사파와 비은사파로 교회가 나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쓰러뜨림이 은혜받는 것과 연관된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다. 다니엘의 경우 천사가 보여준 환상 앞에 압도되어 혼절한 것은 있으며,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집회에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청중들 가운데 졸도하여 쓰러지는 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쓰러짐은 성령의 역사에 따른 수동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손 장로가 의도적으로 쓰러뜨려 은혜를 받게 한다는 것은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니 힌(Benny Hinn)이 미국 신사도운동에서 장풍(掌風)으로 주로 쓰러뜨리기를 하고 있는데(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7280), 손 장로는 베니 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닌가? 베니 힌의 집회를 동영상(정동수 목사, 오순절 은사운동 바로 알기: (사랑침례교회) 사랑침례교회, Charity Baptist Church 제공한 youtube 동영상. 게시 시간: 2012. 06. 28.)으로 보니, “불”이라고 하면서 장풍으로 강대상에 나온 모든 자들을 쓰러뜨렸다. 강대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떨면서 쓰러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웃음이 폭발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앉은 자리에서 집단적으로 쓰러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코너를 향하여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불” 하고 장풍(掌風)을 보내니, 수십 명의 신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그 앉은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쓰러뜨리고, 아우성과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이것을 복음 전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죄의 회심과 새로운 삶의 결단이 없는 설교와 집회는 이방 종교의 모임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들의 모임은 이방인들의 모임과 구분이 되어야 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2-33).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회개의 복음 전파는 없고 신기한 장풍으로 인한 쓰러뜨리기가 지속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보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자본주의 설교가들이 외치는 영광의 신학과 번영의 신학이지 바울과 루터가 증거한 십자가의 신학이 아니며 고난과 헌신의 신학은 아니다.

베니 힌(Benny Hinn)은 최근에는 재정과 조직원의 헤로인 마약과 관련된 스캔들 때문에 공적 신뢰성이 추락한 인물로 평가된 인물이다. 1998년 베니 힌 미니스트리(Benny Hinn Ministry)의 내부 사역자 두 명이 헤로인 과다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그는 조직의 쇄신에 관한 발언을 한 직후 몇 명의 사역자들을 해고했다. 그들 중 전 경찰관 마리오 리시알델로라는, 그의 사역 내부 조사 담당이 포함되었다. 리시알델로는 베니 힌 미니스트리의 수백 개 계좌 정보와 헤로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자료들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베니 힌은 그를 고소하였다. 그때 리시알델로는 경호장으로 있었으며, 베니 힌 미니스티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서류들을 돌려줄 것과 밀봉할 것(공개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것들이 공개되면 그의 사역은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베니 힌이 이 사건에 대한 공탁을 하기 전날, 리시알델로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때 베니 힌은 리시알델로의 부인과 소송 서류를 공개하지 않는 것 등에 관한 법정 밖 합의로 이 사건을 해결하였다(발췌 : http://blog.daum.net/song3294221/10444968).

맺음말

필자는 이 칼럼에서 손기철의 치유사역이 지니는 밝은 측면과 우려스려운 측면을 같이 다루었다. 모든 사역자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역에서도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하고, 부정적 측면만을 들추어 정죄하기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같이 보면서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요청된다. 손기철의 치유사역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하여, 성령의 현재적 사역과 복음 사역에 실제적 효과를 가져다 주는 밝은 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치유사역은 치유보편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세상의 번영과 성공과 치유 만능과 더불어 치유자 신격화 내지 교주화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손기철 장로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신유사역에 관하여 일부 단체가 보이는 것처럼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보다는, 이들의 사역을 잘 지켜보면서 말씀과 교회의 신앙경험에 근거하여 이들의 사역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목회적 신학적 지도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