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세기 10:6)

미스라임 후손들의 정착지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히브리어로 “미츠라임”은 “동쪽”이라는 뜻임)은 우리 성경에서 통상 “애굽”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즉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지금의 이집트 땅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미스라임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은 단순히 애굽만이 아니었다. 미스라임은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성경에는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의, 미스라임 후손들 이름이 등장한다. 이 중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팔레스틴)이 나왔다고 했다(창 10:14). 즉 애굽과 블레셋은 같은 미스라임의 후손들이다. 아나밈은 “바위 같이 단단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나밈의 후손들은 고대 구레네 혹은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르하빔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족의 일부가 되었다. 납두힘의 후손들도 델타 지역의 원주민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바드루심은 바드로스(상 애굽) 지역을 차지하였다. 갑도림은 “갑돌”의 복수형이다. 갑돌은 블레셋의 기원이 되는 땅이었다(렙 47:4; 암 9:7). 성경은 가슬루힘 뿐 아니라 갑도림도 블레셋의 일부가 되었음을 묘사한다(신 2:23). 그렇다면 블레셋의 참 주인은 누구일까? 이 문제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난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블레셋 사람들이 어디로부터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하여 왔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블레셋의 상당수는 가슬루힘이 거주했던 나일강 삼각주와 지중해 크레타 섬 서편에 거주하던 족속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으로 서진(西進)하여 애굽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듯이, 블레셋 사람들도 애굽 땅 나일강 삼각주와 크레타 섬에 진출했던 함의 일부 족속들이 다시 돌아와 갑도림의 후손들과 섞여 팔레스틴 땅에 거주하게 되면서 오늘날 팔레스틴 원주민을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대 애굽 문명을 이룬, 미스라임의 후손들

애굽이라는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보이는 것은 성경을 제외하면 기원전 8세기 경 호머의 오딧세이에 ‘아이굽토스’(Aiguptos)라는 명칭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말은 하 애굽(북 애굽)의 수도 멤피스의 일반적 명칭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하 애굽만을 지칭한 이 말은 상·하 애굽 전체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호 9:6; 사 19:13). 세상 기록에는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하나, 성경에는 이미 창세기 아브라함 시대부터 애굽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애굽 문명의 연대가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은 비옥한 나일강의 양쪽 주변을 중심으로 세계 초대 문명을 이루었다. 이 비옥한 땅에 미스라임 후손들과 셈의 후손 일부가 모여들었다. 그 셈의 일부 가운데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도 끼어 있었다. 상·하 애굽을 통일한 ‘나르멜’의 제1왕조가 시작된 것은 주전 3200년경이었다. 애굽 역사학자 매네토의 구분에 따르면, 구 왕국에 속하는 3-6대 왕조(주전 2690-2181) 시대에 이미 애굽은 피라미드 황금 시대를 맞는다. 애굽 문명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한 곳으로 알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미스라임 후손 중심의 이 지역에 셈족 후예인 힉소스 족이 침범하여 잠시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한 때는, 제2중간기로 불리는 제13-17왕조(주전 1785-1570) 때였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애굽은 이렇게 아브라함이 족장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이미 피라미드를 건설할 정도로 세속 문명이 발달한 대왕국이었다.

성경은 애굽의 바로가 아브라함의 “심히 아리따운” 아내 사래에게 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14). 65세의 사래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애굽 왕이 반했던 걸까? 당시의 생태와 환경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사래는 127세를 살았다. 그렇다면 아마 당시 생의 절반을 산 사래의 미모는, 지금의 30-40대의 모습과 유사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빼앗기지 않고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섭리) 덕분이었다.

애굽과 이스라엘, 그리고 출애굽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애굽 문명을 일구어 번성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운명적 만남을 가지게 된다. 이 역사적 만남은 무엇보다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애굽 방문 이후 애굽에서 현달(顯達)한 요셉의 도움으로, 야곱과 그 후손들은 비옥한 애굽 고센 땅에 정착하여 4세기 동안 살았다(창 15:13). 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파라오가 등장하면서 야곱 후손들은 시련에 처하고,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 노예의 질곡(桎梏)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귀향시키게 된다. 이 내용은 마귀의 지옥 권세에서 하나님 자녀들을 건지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모형(模型)이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도대체 언제쯤 애굽을 떠났던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제 18왕조(주전 1570-1293) 아멘호텝 2세(1450-1419) 시대 전후로 보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된 것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4년(왕상 6:1)이었다. 이 시기는 주전 960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시기는 대략 주전 1440년 경이 된다. 사사 입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헤스본 일대를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삿 11:26)고 말한다. 입다 활동 연대는 주전 1100년 경이었다. 그렇다면 아멘호텝 2세의 시대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주장은 성경의 연대기와 잘 맞아 떨어져 보수적 성경학자들이 선호하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제19왕조(주전 1314-1194 또는 1293-1188) 라암셋 1세(1314-1312 또는 1293-1291) 또는 라암셋 2세(주전 1299-1232 또는 1279-1212/주: 앞의 연대가 좀 더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보수적 연대이고, 뒤쪽의 연대는 세속 고고학에서 보는 연대임. 여기서는 주로 성경적 연대를 존중함) 시대로 보는 입장이 있다. 애굽에는 제19대 왕조부터 제20대 왕조 사이(약 주전 1314-1085)에 라암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11명 있었다. 출애굽기에 모세 출생 이전 국고성 라암셋 건축 이야기가 나오므로, 모세의 출애굽을 자연스럽게 라암셋 성 건축 이후로 보는 견해이다. 이 중 성경의 라암셋을 67년을 통치했다고 알려져 있는 라암셋 2세로 보는 견해이다, 그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히타이트 족과 전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즉위 21년에는 히타이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나라가 공동으로 해양 세력과 맞서 싸우는가 하면 오늘날까지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부 심벨 신전과 카르낙 신전 그리고 라암셋 왕궁(출 1:11)등 많은 기념물을 건축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미이라(Mummy)가 남아 있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동원된 국고성(國庫城) 라암셋은 당시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이 성은 이후 400여년 이상 존속되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갈 때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창 12:37; 민 33:3, 5). 성경의 국고성 라암셋 건축이 라암셋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경우, 국고성 건축은 모세가 태어나기 전인 라암셋 1세(3년 통치)나 세티 1세(23년 통치) 때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출애굽은 라암셋 2세 때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진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으므로 대략 주전 1314-1289년 사이, 즉 3년 내지 20여년 만에 모세가 80세가 되었다는 모순의 발생을 막으려면, 라암셋 1세나 세티 1세가 아닌 라암셋 2세로 봄이 좀 더 성경에 접근할 수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보수적 학자들이 아멘호텝 2세 전후를 출애굽 시기로 보는 반면, 세속의 고고학 성과를 수용하는 학자들은 라암셋 시대 출애굽을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이 두 주장은 사사건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요단 동편 땅에는 B.C 1900-1300년에 정착민들이 없었으므로, 에돔 족속과 같은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람세스 시대 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반대하는 측은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주전 16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후기설의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1300년까지 ‘하솔’(Hazor)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솔이 두 번 멸망했다고 말한다. 1차 멸망은 여호수아에 의해서이고, 그 후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하솔에 의해서다(수 11:6-14; 수 19:36). 이후 솔로몬 왕은 하솔 성을 요새화하여 홀레 평원과 북방 지역을 지키는 요충지로 삼았다(왕상 9:15). 하솔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이 성읍이 1400년경에 멸망했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물론 출애굽의 시기에 대해 양측은 서로 입장을 전혀 양보하지 않고 팽팽히 맞서 있다.

19세기 말 애굽 테베(Thebes) 지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바로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의 발견이었다. 메르넵타(주전 1224-1214 또는 1212-1202)는 라암셋 2세의 아들로, 그를 이어 애굽 파라오가 된 인물이었다. 검은 화강암에 상형문자들로 가득한, 높이 2미터가 조금 넘는 이 석비는 주로 애굽 파라오 메르넵타가 리비아를 공격할 때 탈취했던 노략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마지막에 놀랍게도, 파라오 메르넵타가 이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성경을 제외한 문헌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씨(후예)는 이제 없다. 후르(지금의 시리아)는 애굽을 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주전 1215년(또는 1207)이며 메르넵타의 가나안 침략은 주전 1220년(또는 1212년) 일어났다. 메르넵타 시대 가나안 땅에, 애굽 파라오가 맞서 싸우고 그 전쟁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정치적 이스라엘 세력이 존재했다는 언급은, 아무래도 라암셋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다는 주장에 불리한 고고학 자료라고 볼 수 있겠다. 출애굽 당시 홍해에서 수몰당한 애굽 군대가,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추적해 와서 정복했다는 것은 성경 기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르넵타의 가나안 원정과 이스라엘과의 전투는 출애굽 이후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황금 미이라 두상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왕(주전 1334-1325)은 제18왕조 후기의 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투탕카멘 왕 즉위 약 10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성경적으로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보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제18왕조 시 출애굽설을 지지한다. 하지만 앞의 두 주장은 모두 성경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 팽팽한 두 입장 가운데 어떤 주장이 더 타당한지는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더 지켜보기로 하자.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의 운명적 갈등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뿐 아니라 미스라임의 또 다른 후손인 블레셋과도 끈질긴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블레셋이라는 이름은 일찌감치 성경에 등장한다(창 10:14, 21:32, 34; 26:1-18; 출 13:17; 15:14; 23:31). 블레셋은 고대 가나안 팔레스틴 서부 연안지대의 국토에 정착한 민족의 명칭이다(창 21:32, 겔 16:57). 이들은 오늘날 아랍 민족이 주장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셈족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었다. 블레셋 족속은 가나안 해안가에 살던 7 부족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함족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이들은 애굽과 크레타 섬 등을 떠돌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 지역은 악과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다. 하나님은 잡신과 우상과 악으로 가득 찬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여기서부터 블레셋 민족과의 끈질긴 악연이 이어져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기도 했으며(삼상 4장), 블레셋은 사울과 다윗의 주요 대적 상대였다. 소년 다윗이 용감하게 상대한, 온 유대 군사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유명한 거인 골리앗 장군도 바로 블레셋 사람이었다.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은 이들 블레셋과 끈질긴 전투를 벌이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삼하 21:16-22, 23:8-19). 솔로몬 시대 비로소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평화를 되찾는다(왕상 4:21).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으로 인해 함께 정복당하고, 유사한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이 두 민족은 다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이름으로 나뉘어 그 끈질긴 운명적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미스라임 후손들의 미래

애굽과 블레셋으로 대표되는,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성경적으로 분명 이스라엘 민족과 끈질긴 관계를 맺은 민족이었다.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과 긴장 관계에 있었으며, 애굽 왕 바로도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출 14:17; 롬 9:17, 18). 애굽은 거짓 신을 섬기는 대표적인 나라였을 뿐 아니라(출 12:12), 성경에서 애굽은 늘 거만하며 정욕적이고(출 23:19-21) 행음의 지역이었다(겔 23:3). 또한 애굽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소돔이었다(계 11:8).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던 국가가 세상에 어디 있었던가? 이스라엘도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의 초기 시대를 빼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국가요 민족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차별이 없으시다는 점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 애굽과 앗수르에게도 은총을 베풀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사 19:25).

비록 조금 이질적 교리를 가졌지만, 애굽은 오늘날 콥트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콥트교회는 세계교회 중에서 아주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주후 260~340경)에 따르면 전도자 마가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즉 마가가 말년 이집트로 건너와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콥트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콥트’란 명칭은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들어온 무슬림들이 7세기 이집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집트인들을 헬라어로 아이굽토스(ai“gupt”ios)라 부른 데서 기인한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핍박과 박해에서 피신했던 남쪽 이집트 도시 ‘콥토스’(오늘날 쿠프트, 구브탄)에서 주로 살고 있었다. 콥트란 용어는 초기 이집트인을 순전히 인종적 차원에서 지칭한 것에서, 이집트인 중 기독교인을 일컫는 인종-종교적인 의미가 되거나 콥트교회의 예배의식을 일컫는 순전히 종교적 용어로 변한 것이다.

애굽은 예수님께서 유아 시절 헤롯의 박해에서 부모와 더불어 긴급 피신한 지역이기도 했다. 콥트교회는 지금도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콥트교인들은 세찬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유적들을 지켜온 것이다. 마가의 전도로 애굽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도시로 변했다. 이곳은 일찌감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시였다. 바로 주전 2-3세기 중요한 성경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Septuagint)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콥트교회는 자신들의 교회 원년을 서기 284년으로 한다. 이 해는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이 로마 황제로 즉위한 해였다. 교회 역사에서는 이 황제의 통치 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극심한 교회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콥트교회는 이 핍박을 견뎌냈다. 콥트교회는 또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이기도 하다. 이들 콥틱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트교회는 세계교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기 451년 칼케돈(오늘날 터키지역)에서 개최된 제4차 기독교공회의에서 콥트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콥틱은 삼위일체는 인정하나 기독론에 있어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하여 세계교회와 갈라졌다.

중동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바람과 이슬람의 압박 속에서, 미스라임의 후손인 이들 애굽과 팔레스틴과 이들 속의 소수 기독교인들의 미래는 어떠할까? 과연 이들 소수 기독인들이 우리들 신앙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이들은 온갖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세상의 불의와 불신과 악함에 대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함족 미스라임을 셈족 이스라엘, 앗수르와 더불어 나의 손으로 지은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면서 사랑하신다(사 19:24-25).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