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떠난 종교는 존재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이어령 박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주제로 문학강좌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가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주제로 6월 양화진 목요강좌를 진행했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레프 톨스토이가 쓴 중단편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다. 주인공 이반의 죽음을 알리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기던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갑자기 이름도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리면서, 삶의 가치와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와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을 쓴 이후 명성이 퍼지고 인세도 늘었지만 10년간 심각한 정신적 위기와 죽음의 공포에 빠졌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발표하면서 다시 종교적인 힘을 되찾는다. 작품을 통해 삶에서도 큰 분수령을 맞게 된 것. 이 박사는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결국 과학이나 예술이나 시가 아닌 종교”라며 “어떤 종교적 냄새 없이도 가장 종교적인 마음을 들게 하는, 신(神)이라는 단어 하나 없지만 읽고 나면 크리스천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감동을 받게 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령 박사는 “제가 인생에 대해 절대로 여러분들 앞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며 “내가 죽으면 여러분들 앞에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며 “소설이 위대하고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죽은 자의 입으로 죽음에 대해 들을 수 있는 희귀한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빌딩을 지으면 4층 대신 F층이라 이름하고, 서양에서는 13, 일본에서는 9를 피한다”며 “이처럼 우리가 가장 잊어버리고 있는,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은 ‘죽음’”이라고도 했다. 그는 “죽음을 안다는 것이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누르듯 불길한 것인가”라며 “행복은 정상이고, 고통과 죽음은 비정상인가?”라고 반문했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사는 일이, 살고 숨 쉬고 사랑하고 질투하는 일상의 사소한 의미들을 갑작스레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죽음을 몰랐기에, 생명을 모른다”고도 했다.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그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19세기 러시아 작가가 러시아어로 전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들어 보면 우리나라, 우리 집안, 내 이야기 같다”며 “특별하지 않은, 99%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오늘 밤 우리가 ‘임사체험’을 하는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일리치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국가나 민족주의, 한 사람의 이기주의나 인간이 쌓아올린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어떤 종교나 이념도 마지막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이길 장사가 없다”며 “죽음이 아니면 이 철옹성 같은 인간의 가치를 부술 장사가 없다. 그 많은 사상과 문화, 상품, 건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죽음에 대해, 톨스토이는 정면으로 묻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이에 해답을 얻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누구도 제 말을 믿지 않거나 제 말이 틀릴 수 있지만, 오늘 밤 절대 틀리지 않는 예언을 하자면 여러분들도, 나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 100년 뒤에도 여기에 남아 계실 분은 거의 없다는 것”이라며 “절박한 죽음을 앞에 놓고, 여러분들은 왜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가? 여러분이 크리스천이 된 이유가 적어도 죽음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 아닌가?”라고 했다. “종교가 아무리 현실에 참여하고 새로운 신학이 나타난다 해도, 죽음을 떠난 종교는 존재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세상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두 종류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실제로 작품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 봤다면 읽은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죽어도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거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람이 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만약 영원히 산다면 ‘생명’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낮만 있고, 생명만 있는 세계에 어찌 어둠과 죽음이 있겠는가? 생명이라는 말은 죽음이라는 바탕이 있기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 박사는 “지금까지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에 대한 소설이 없다”며 “21세기 오늘날에도 죽음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얼마나 딱한가? 이는 사는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늘날 정말 배워야 할 학문이 있고 진리가 있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실증적인 연구이며, 죽음을 덮어놓은 채 생명을 이야기하는 누구라도 생명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후 그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3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주인공의 직업이 왜 판사였느냐는 것이고, 둘째로는 주인공이 사다리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장면의 의미, 셋째는 주인공이 죽어갈 때 아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판사는 세속적 의미에서 황제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나 꿈꾸는 출세의 대표이자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대우받는 존재로, 주인공이 판사가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라며 “또한 판사는 죄수들을 끝없이 심문하는 자리로, 내가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심판하는,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인간이면서도 남을 죽게 할 수 있는, 의사와 더불어 타자(他者)의 죽음에 관여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 그는 “의사와 판사 모두 생명을 다루면서도 가장 생명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라며 “늘 심문을 하던 판사가 환자가 되고 나니 죄인이 심문당하듯 의사에게 취급당하게 되는데, 이는 교활해 보이하기까지 한 톨스토이의 전략”이라고 했다.

둘째 질문과 관련, 주인공은 판사로서 승급 기회를 노리다 어렵사리 5천 루블을 받는 직급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마음이 달라져 대저택을 사서 꾸미기 시작한다. 그는 도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부가 잘못 붙이자 모범을 보여온 삶에 걸맞게 자신이 나서는데, 사다리에 올라갔다 미끄러지고 만다.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게 되는 것. 이 박사는 “인생의 절정에 올라간 순간, 일평생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듯 추락하는 것”이라며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끝없는 내리막길로 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장면을 상징한다”고 풀이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죽음의 인칭’에 관해 피력했다. 소설은 맨 처음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며 3인칭, ‘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도 죽을 텐데 죽음에 관해 냉담하고, “그가 있던 자리에 누가 승진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토론한다. 이 박사는 “이게 우리 이웃, 타자들로, 죽음이 남긴 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과제로 삼을 뿐,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병원과 영안실이 직통으로 돼 있는데, 환자들의 심정이 어떻겠나”고 되물었다. 생명을 지켜줘야 할 병원이 죽은 사람까지 받아주고 있다는 것. 그는 “어떻게 생각하면 직통이라 합리적이긴 하다”며 “죽음은 의학의 패배인데 이겨도 져도 병원 소관이라는 점이고, 인간이 이렇게 끝난다”고 했다.

주인공의 죽음 앞에 가족들은 그나마 2인칭, ‘당신의 죽음’으로 반응한다. 이 박사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의 죽음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말하려는 것”이라며 “아내도 딸도 타자일 뿐인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존재가 바로 평소 살갑지도 않게 여겼던 막내 아들로, 아이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에 주인공의 손이 젖을 때, 비로소 갑작스레 모든 통증이 멎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작은 빛’이 주인공에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주인공은 이때 아들의 눈물이 뜻하는 바가 ‘사랑’임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기 중심으로 살던 사람, 남을 한 번도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이 죽음의 극한 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은 관심도 없던 아들의 눈물 덕이다. 주인공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 고통이 없었더라면 잘못 살아온 인생, 허위와 위선으로 끝날 인생을 1시간 동안 제대로 느끼면서 참을 수 없는 기쁨 속에 마무리한다. 그는 이를 “대역전극”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거짓이라면, 가짜 인생이라면 10년, 100년 살아서 뭐하겠는가”라며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시면 자신에게 ‘하우스(집)는 있고 홈(가정)은 없는지, 하우스는 없어도 홈은 있는지 관찰해 보라”고 권면했다. 그는 “저 자신도 제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을 사랑하지 못했는데, 침대에 드러누워 수술을 하고 난 뒤 ‘다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할 말이 없어도 괜히 하게 됐다”며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비행장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사랑한 사람이 공항에서 더 사랑하게 된다. 이제 들어가라는데도 다시 돌아보면 문틈으로 보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하지만 그때 우리는 존재한다”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빅터 프랭클의 ‘고뇌하는 존재(homo patience)’와 3가지 삶의 의미(창조·체험·태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Kubler Ross)가 제창한 부인-분노-타협(거래)-우울(침체)-수용의 ‘사망 5단계’ 등에 관해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메멘토 모리”를 외치면서 “마지막 한 시간 동안 죽음에 관해, 삶에 대해 깨달았던 이반 일리치보다는 여섯 살 때 벌써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제가 나았지 않았나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쓴 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수록돼 있는 ‘메멘토 모리’를 읊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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