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필자는 이제 와그너의 신사도신학에 대해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보다 세부적인 비판적 성찰을 하고자 한다. 신사도운동이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복음주의 좌파들(the evangelical left)이 추구하는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예지를 제한하고 있다.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나 모든 사건의 결과를 하나님도 예지하시거나 미리 결정하시기를 포기하셨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인간 자유의지를 대립시키는 인본주의신학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보다 현재의 말씀 레마(Rhema)를 중요시하여 내적 음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미래적 왕국보다 현세적 지상 통치를 강조하여, 이 지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왕국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부의 왕국을 강조하고, 지상에서의 예수의 신성 사용을 유보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신사도신학은 체험주의와 물질주의와 번영주의의 위험성에 빠지고 있다. 

1. 열린 유신론 수용, 하나님 주권과 예지 제한
 
와그너는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을 수용함으로써 하나님 주권과 예지를 제한하고 있다, 와그너는 피력한다: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면 어찌 되었든 그 일은 일어나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가능성을 열어 놓으셔서 인간의 선택에 맡겨 놓으시기를 작정하셨다는 것이다.”(C. Peter Wagner, Dominion, Ventura, CA: Regal Books, 2008; 서종대 역, Dominion. 과천: WLI Korea, 2007, 100). 결국 와그너는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 제한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열린 유신론이 시도하는 와그너의 하나님 주권제한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는 성경에 위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5).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주권에 의한 것으로서, 인간 자유의지나 행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마 10:29-30) 하나님의 섭리는 무척 섬세하시다고 가르치신다. 그처럼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 어떤 제한도 없으시다고 믿는다. 

그런데 와그너는 인간의 자유의지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예지를 제한한다. 와그너는 열린 유신론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실지 미리 알지 않기로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셨다고 주장한다(C. Peter Wagner, Dominion, 103). 와그너에 의하면, 미리 정하신다는 것은 마치 도박 카시노에서 슬롯머신을 미리 조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이 아무런 제한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주권적 예지를 제한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은 철학적으로는 이율배반적이나, 신학적으로는 전혀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2. 기록된 말씀보다 현재의 말씀 레마(Rhema) 중요시

와그너는 기록된 말씀보다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는 통치신학을 주장하면서 “또한 성경에 기록된 것(로고스)과 하나님께서 현재 말씀하고 계신 것(레마)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C. Peter Wagner, Dominion, 70). 그러나 와그너가 레마를 로고스와 대등하게 보는 것은 위험하다. 많은 직통계시파들이 자기들이 임의로 받은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계시 주장으로 나갈 열광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확정이요, 기록된 계시의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만 진리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이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쓰인 계시 말씀에 대한 성령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말씀인 레마(Rhema)는 기록된 말씀(성경)과 다른 말씀일 수 없고, 오로지 기록된 말씀에 대한 내적 확인일 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천명하는 바와 같이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신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며, 오늘날에도 기록된 말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레마의 타당성이란 쓰여진 로고스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자기가 전파한 복음의 계시가 표준이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3. 미래적 왕국보다 지상 통치 강조

와그너는 미래에 다가오는 하나님 왕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의 통치를 강조한다. 와그너는 인간의 통치를 하나님 나라보다 우선시한다. 와그너는 통치신학의 근거를 창세기 1장 28절에 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와그너는 이 구절을 통치신학의 근거로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세상을 통치할 온전한 권세를 부여하셨다.”(C. Peter Wagner, Dominion, 76). “이것이 바로 내가 통치신학이 하나님 나라 신학보다 성경적으로 더욱 포괄적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약적인 주제임에 반하여 통치신학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게 어울리는 주제이다.”(C. Peter Wagner, Dominion, 76.). 그리하여 그는 현재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이에 반해서 개혁신학 전통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적 위임(cultural mandate)으로 보고 문화신학의 근거로 해석한다. 와그너 주장처럼 통치신학의 근거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와그너는 인간의 지상통치를 강조하여, 하나님도 통치권을 인간에게 위임한 이상 하나님도 통치 명령에 종속한다고 주장한다. 통치신학은 와그너가 신사도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어구들에서 드러난다. “어린 양 예수에서 사자 예수로”, “십자가에서 면류관으로”, “상담에서 귀신 축출로”, “예전에서 자발성으로”, “ 예언하는 것에서 예견하는 것으로”(Peter Wagner, Church Quake, Regal Books, 1999, 홍용표 역,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이레서원, 2000, 66.)를 강조한다. 이러한 와그너의 창세기 해석은 ‘구속사적 십자가 신학’을 ‘번영하는 통치신학’으로 변질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4. 지상에서 부의 왕국 강조

와그너가 지상에서 부의 왕국을 강조하고 이 왕국을 통치를 통해서 이룬다는 낙관적 종말론은 비성경적이다. 와그너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교회의 모든 멤버들이 백만장자가 되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와그너는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위하여 지혜와 더불어 부와 번영을 획득하는 것”(C. Peter Wagner, Dominion, 244.)이 중차대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와그너는 부(富)를 복으로 보고, 가난을 저주로 본다. 이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난은 ‘굶주림, 목마름, 헐벗음,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 부족한 상태’로 묘사된다”(신 28:48). 와그너는 “이러한 재난들을 ‘저주’라는 말로 표현한다.”(C . Peter Wagner, Dominion, 236.).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번영이며, 사단의 의도는 가난이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가난의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사단의 하수인이다.”(C. Peter Wagner, Dominion, 237.). 이러한 와그너의 종말론은 낙관적 종말론으로, 전통적 기독교의 비관적 종말론과는 다르다. 그의 통치신학은 가난의 극복을 통해서 승리의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승리의 신학에는 고난과 고통과 인내가 없다.

5. 예수의 신성 사용 유보론은 비성경적이다

와그너는 예수의 신성 사용 유보론을 주장한다. 이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는 그의 신사도적 성령운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지상 예수의 신성을 유보시킴으로써, 성경적 예수론을 왜곡한다. 와그너는 지상적 예수가 오로지 성령으로 충만한 인성으로 기적과 표적을 행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통적 공교회의 기독론과 다르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예수는 신성을 사용하셨다. 그 구체적인 예가 변화산에서 변화되고, 물 위를 걸으며, 바다의 폭풍을 잠잠하라고 꾸짖은 그의 사역에서 드러난다.

와그너는 예수께서 신성와 인성 두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와그너는 “제3물결 운동”을 기독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성령이 예수 능력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신성 사용 포기설을 주장한다. 지상 사역 시 예수는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하기 위하여 신성을 사용하지 않기로 복종의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한다. “예수는 신적 속성들을 물론 가지고 있었지만, 자발적인 복종으로 그것들을 사용치 않기로 아버지와 동의하셨던 것이다.”(Peter Wagner, How To Have a Healing Ministry Without Making Your Church Sick, Ventura, CA: 1988; 정운교 역, 『제3의 바람』, 인천: 나눔터, 1993, 124.). 와그너가 예수의 신성 사용 포기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지상에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능력 전도를 위한 기독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와그너는 천명한다: “성령이 예수 공생애 동안 그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었다. 예수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어떤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다.”(Peter Wagner, 『제3의 바람』, 120). 예수께서 “인성을 지니신채로 그의 생애를 보내셨기에”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보다 큰 일도 행할 수 있다. 우리들도 예수의 모든 능력의 근원에 연결되어 사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Peter Wagner, 『제3의 바람』, 120).

그러나 신성 사용 포기설은 심각한 기독론적 이단설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예수의 능력이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부터만 나왔다고 주장함으로써, 내면적으로는 양자 기독론의 입장을 취하게 한다. 이러한 입장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난 후에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보는데, 그것은 니케아 회의 때 이단으로 지목받은 아리우스파의 기독론이 되어 버린다. 예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태어나셨고, 삼위일체 2위로서 1위인 아버지와 3위인 성령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 계신 분이다. 와그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신성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의 계약은 완전히 끝났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신적 속성을 다시 쓰시기 시작하셨다.”(Peter Wagner, 『제3의 바람』, 132.). 이러한 해석은 지상의 예수의 본성을 제한하는 것이요, 그의 신성을 유보시키고 그의 인성이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만 지배받도록 하는 성령일원론적 구성(the spiritmonistic construction)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지상적 예수의 능력 사역에서 예수의 신성은 사용되지 않고 유보되었다는 주장에는, 삼위일체적론 성찰이 부재하고 성령만이 지상적 예수의 사역에 능력의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령일원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6. 체험주의에 빠지고 있다

와그너는 계시된 성경을 넘어서는 체험주의에 빠지고 있다. 와그너는 오늘날 사도직을 강조하고, 이 사도직은 소명은 당사자가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직접 계시로 받는다고 주장한다(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4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계시” 내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용어의 인플레이션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하나님 말씀” “계시”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은혜받았다” “감동받았다” “감명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계시“나 ”하나님 말씀“을 너무 자주 쓸 때,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는 열광주의의 위험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하나님 말씀이나 계시는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가 받은 내적 말씀은 정경적인 하나님 말씀이나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모든 주관적인 체험은 객관적인 신빙성의 결여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경에 기록된 계시에 조회되어 음미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집회의 동영상을 보면, 신사도 사역자들이 단상에 올라온 신자들을 안수나 장풍으로 쓰러뜨리거나 심지어는 단상 아래 좌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까지 집단적으로 파도처럼 쓰러뜨리고 있다. 이는 성경에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행위로, “과연 이것이 성령의 사역인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제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성령의 역사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 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7. 물질주의와 번영주의의 위험성

와그너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물질주의와 번영주의의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다. 와그너는 사회변혁의 두 중요한 기둥으로서 “일터교회”(the church in the workplace)와 “부의 거대한 이동”을 든다. 그러면서 거대한 부가 있어야만 사회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들을 고수하는 의로운 사람들의 수중에 막대한 양의 재산이 없다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변혁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C. Peter Wagner, Dominion, 18.).

와그너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부의 이동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물질적으로 측정하는 것이요, 지상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와그너는 사회변혁을 부의 거대한 이동과 연관시키고 있다. 와그너는 피력한다: “사회변혁을 지지하는 기둥들은 거대한 양의 부에 대한 통제능력을 획득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C. Peter Wagner, Dominion, 239.). “부의 이동”이란 “가난의 영을 결박”하는 것이다. 와그너의 의하면 막대한 부가 있어야만 사회변혁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뜻은 부해지는 것이다” “가난은 저주다” “많은 교인들에게 많은 돈을 걷어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즈니스의 기름”이란 용어는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는 물질주의 원리다. 이러한 와그너의 사상은 자본주의 원리이지,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전파하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가 천국의 소유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고 보기 어렵다.

맺음말

이상에서 보면 신사도신학은 다가오는 미래적 천년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현재적 이 지상 위의 하나님 왕국, 그것도 부의 조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물질적 번영을 통해서 완성되는 지상의 나라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신약 복음이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나라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고 하였다. 이는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그것은 부의 이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나라가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이루어지는, 물질적 차원을 초월한 왕국이다. 이런 면에서 신사도 개혁이 추구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물질적으로 부를 이루는 왕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의와 평강이 지배하는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성령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지상 위에서 예수의 신성 사용 유보설을 주장하는 것은, 성령일원주의의 위험성에 빠지는 것이다. 신사도신학은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신학으로부터 성경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와 헌신보다는 부와 번영을 강조하여, 번영의 신학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 그리하여 올바른 성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신사도신학은 스스로 잘못 이해했거나 편협적으로 이해한 역사적 예수론, 하나님 나라와 현실에 대한 참여와 관계론 등, 전 신학적 체계를 하나님의 주권론과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