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노벨상 작가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1883-1957)를 추모하면서 자신보다 100배는 더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할 작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젊은 시절 카뮈의 문학에 애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그의 찬사가 겸손인 동시에 진실이란 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잔차키스의 글을 읽으면서, 섬광처럼 재현되는 카뮈의 흔적을 보고 신기해 하리라.

우리의 젊은 시절은 일상의 작은 기쁨과 슬픔, 작은 소망들을 재잘거리는 참새들과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워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을 슬퍼한다.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망각 속에 묻힌다 하더라도, 세상은 아무 것도 상실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많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저한 고독 속에 자기 자신이 내던져진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행운처럼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유라에게 선물받았다. 속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왔다. “네 영혼의 편력에 도움될 이 책을, 만남 3주년을 기념하여”라고. 당시 <영혼의 자서전>은 이미 초판 15쇄까지 발행됐으니, 나는 참으로 늦게 카잔차키스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슬픔과 고통의 멍에를 저 홀로 질 때 누군들 방황하지 않고 길을 떠나리.” 책 서두의 이 한 마디를…. 그렇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편력을 함축하고 있는 이 한 마디는 일상을 재잘대고 있는 참새 같은 우리로 하여금 날개치고 비상하는 독수리로 만들어줄 것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리게 한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시기적으로 평범성과 일상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지극히 단순한 욕구와 맞물리면서, 책은 엄청난 힘으로 내면을 흔들었다. 손에 든 순간부터 불과 몇 시간 만에 600쪽 분량의 책을 모두 읽었다.

내 독서 습관 중 하나는, 작품을 읽기 전 그 작가에 대한 정보를 배제하는 일이다. 이 습관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작품을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로 받아들이려면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작품과 나 사이에 어떠한 선입관도 원치 않는다. 이 독서 습관 때문에 어떤 작가의 작품은 글쓴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일주일 만에 세 번 읽었다. 이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를 읽고, 숨 고를 시간 없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미할리스 대장>, <수난>, <소돔과 고모라> 등으로 달려갔다. 문체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은 그렇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작품을 읽어가다 피곤해지면, 그의 삶에 꽃을 뿌린 수많은 여자들을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 보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일상적인 여인들에게 어떻게 늘 눈부신 처녀성을 부여할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서 그가 택한 삶과 투쟁 방법에 나는 박수를 쳤다. 때론 시의 운율이 줄지어 요란하게 밀려오는 소리도 들었다.

<영혼의 자서전>에는 내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처음 공부한 소설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시련이 있었다. 신성모독을 이유로 그를 파문시켰던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에 대한 나의 시각에도 변화가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미할리스 대장>을 통하여 나는 카잔차키스가 인식한 하나님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