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안데르센의 동화로 이해되는 덴마크라는 나라는 언제나 밤이어야 하는데도, 낮 같이 환하다. 해가 진 후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뾰족 지붕의 집들과 하얀 고속도로가 있고, 수레국화처럼 파란 바다가 있다. 그런 밤의 적갈색 하늘 밑에 누워서 황새와 백조와 요정과 함께 숨 쉬는 땅, 이것이 안데르센의 동화로 이해되는 덴마크의 모습이다.

그의 고향 마을 오덴세 역시 우리 문학적 삶과 무관하지 않다. 안데르센을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문화 예술의 신처럼 모신 땅이다. 기념공원의 야생 백조는 여전히 조각처럼 날아 반기고, 가난한 구둣방 집 아들이 만든 종이 오리와 그림과 추억의 물건들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우리의 추억이다. 비록 궁핍하고 초라하였지만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었던 시간들을 되돌려 준다. 기념관의 도서실에서 수화기를 들고, 수많은 나랏말로 번역이 된 그의 동화의 화려한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을 보라. 여전히 오리떼들이 헤엄쳐 가는 연못 옆으로 오덴세 강의 아름다운 물줄기가 보인다.

나는 맡은 직책으로 인하여 여러 번 덴마크를 방문하였는데, 그 중에서 처음 안데르센의 고향마을을 방문했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때 오덴세에서는 안데르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그를 오딘 신처럼 모시는 행사를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 시절에 불과 세 평 남짓한 그 서가에서 만난 안데르센이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감성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린 시절이 되돌아오는 듯하였다.

어쩌면 일생 동안 지구를 서른세 번이나 여행을 했던 안데르센의 열정이 내면을 흔들어, 나로 하여금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문학세계사, 1990)> 여행을 하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다. 젊은 시절 <이 지구를 떠돌고 싶다(미리내, 1994)>고 입버릇처럼 말하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다.

늘 남쪽 나라에 대한 절절한 향수를 품고 살았던 안데르센, 내가 핀란드의 산타마을에서 북극의 오로라를 대했을 때에도, 괴테가 그리워 그의 고향 마을 브로겐 산에 올라갔을 때에도, 안데르센은 그곳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기다려 주었다. 전율적인 기쁨이었다.

우리의 내면에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 새로운 형상을 가추는 자연과 사물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우리 상상의 세계가 늘 새롭게 솟아나는 물줄기와 같고. 우리의 언어, 낱말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로써 그분의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이 은혜의 물방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 ‘새로운 미’ 니하운 항구에 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이 중세 이후 북해 무역의 중심이었을 당시 만든 인공 항구다. 파스텔풍의 유서 깊은 건물들이 늘어서있는 곳, 안데르센이 참으로 사랑했던 곳이다. 고향 오덴세를 떠나 그의 가난했던 청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성공한 작가로서의 삶을 산 마지막 2년도 니하운 18번지의 집이다.

니하운 69번지에는 안데르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요트가 들어오고 범선들이 정박하면 뱃사람들을 위한 평화로운 휴식공간이 된다. 그들은 안데르센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바쁜 일상에서 놓인 시간들을 되돌리는 것이다.

나도 오늘은 운하를 따라 걸으며 안데르센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여러 건물들을 다시 찾아가려 한다. 아름답고 투명한 그의 감성의 세계는 여전히 문학적 그리움을 흔들 것이다. 내가 멜로디를 그려가며 노래처럼 불러보았던 그의 이름이 순은의 종소리로 들려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요트 하바를 다시 볼 것이고, 랑글라니에 거리를 거닐던 여러 밤을 기억할 것이다.

스트로이어트 거리의 어릿광대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인어의 몸으로 인간인 왕자를 사랑한 아가씨를 생각하자. 그런 후에는 스칸디나비아의 남단, 그 꿈꾸는 백야의 하늘을 그리워하자.

항구에는 여전히 눈발이 성글게 나부끼고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눈송이는 화분 가장자리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 눈송이는 점점 커져서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그녀는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눈송이로 만든 옷을 입겠지. 그렇게 메르헨의 세계는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