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31 이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를 죽인 이들은 자기들 때문에 안식일 날 십자가에 시체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 싫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다리를 꺾으라 했다. 이는 새의 다리를 꺾는 것 같은 식이 아니라, 해머 같은 것으로 다리를 찍어 부러뜨리는 것을 말한다. 군병들은 두 강도들의 다리를 꺾었고, 주님에게 와 보니 이미 운명하셨기에 꺾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그곳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그것을 요한이 보았다. 주님은 이렇게 죽으셨고 또 완전히 죽으셨음이 확인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안식일이 다 되어가므로 더럽힘을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만일 시체가 안식일까지 매달려 있으면 안식일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의 법은 시체는 당일에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그러나 로마인의 관습대로 조금 더 둘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안식일을 고려하고 그때 도달할 많은 사람들의 혹 있을 동요도 고려하여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병사들은 두 강도의 다리를 꺾고(여기서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의 말씀을 응하게 하셨다), 주 예수의 시체에 와서는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 한 병사가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이 또한 구약 이사야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게 한 것이다(사 53:5, 슥 12:10).

요한은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말한다. 그분의 옆구리가 열린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아담의 옆구리를 열어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얻으셨다(창 2:21-23, 엡 5:2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그가 본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진실한 증인은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는 법이다. 요한은 특별히 이 지점에서 자신의 기록의 참됨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록자의 진실성을 한번 확실하게 해주고자 했다. 그것은 그가 이 사실들을 읽고 믿는 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는 이 사실들을 우리들로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해 주었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증인이다. 그는 주 예수의 최후의 모양을 지켜본 증인으로서, 당시 여러 이단들의 이설에 대하여 참된 증거를 증거하고 있다. 그는 그분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만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물이 나온 것도 기록하였다.

죽으시고 장사되신 주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해 말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잉태할 것이다, 또 그분은 가난한 인생을 살고 슬픔의 사람이 될 것이다, 간고를 많이 겪을 것이다, 그는 못 박힐 것이다, 찔릴 것이다,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온전히 운명하셨다. 그리고 그 시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져 장사되었다. 이제 주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부분을 살펴보자.

구약 성경에 예수는 정말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사람으로 오시고 가난한 땅에서 초라하게 자라시고 생활하실 것이며 또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비참하게 돌아가신다고 예언되어 있다. 시편 22편에도 참혹하게 고통 속에 돌아가실 것이 다 예언되어 있는데, 장사지내는 것만큼은 부자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53장 9절 말씀은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했는데, 히브리어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의 무덤은 악인과 함께 있도록 지정되었으나 그는 죽음에 있어서 부자와 함께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에 부자들이 참여한다는 것을 예수님 오시기 칠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성취되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섬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는데 그는 부자였다(마 27:57). 또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다(막 15:43). 당시에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유대인으로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높은 지위로서, 오늘날의 국회의원 이상이 되는 위치였다. 그러난 그는 예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눅 23:50-51). 당시 산헤드린이 모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사형 판결을 받도록 했다. 당시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 위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본문에서 요한은 그가 예수의 제자이지만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고위 관리층도 있었다는 것이다. 12장 42절에도 그런 기록이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공회원이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기에,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렸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이 사람의 양심은 깨어났다. 그는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 이 사람은 공회 위원이기 때문에 빌라도를 만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때야말로 일어나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나 하는 마음으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사실 그때 이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돌히’라는 말을 썼다. 당시에 제자들은 잡혀서 죽을까 봐 거의 다 도망갔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숨어서 비밀리에 제자의 생활을 했던 요셉이라는 부자는 이때 주님을 위해서 나섰던 것이다.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빌라도는 그의 요구를 허락해주었다.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보다 뒤처져 있었던 부자 관원 요셉이었지만, 아무도 나설 수 없는 그때 그의 신앙이 빛을 발하게 된 케이스이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때가 바로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망설이지 말기 바란다.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주를 위해 무언가를 행함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지금까지는 주님을 위해 나타남이 부족했고 충성을 드리는 것이 부족했을지라도 끝까지 그러라는 법이 없다.

당시 예수는 유대 지도자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받고 십자가에 처형된 상태였다. 요셉은 그 이전에는 차마 자기 신분을 노출하기를 꺼린 약함이 있었지만, 주님이 돌아가신 이 시점에서라도 ‘나는 여러분들이 버리고 정죄하고 죽인 그 예수의 제자이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차디찬 시체가 되셨기에 요셉은 예수님으로부터 아무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는 주님의 시체를 받아서 그가 예비해 놓았던 아주 좋은 새 무덤으로 운반했다.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니고데모의 섬김

또 한 사람이 나온다. 이전에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였다. 그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사용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요 유대인의 선생이었다. 그는 낮에 떳떳하게 예수님께 나와 무언가를 질문하고 대화하기 꺼렸던지, 밤에 와서 예수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니고데모 역시 부자였다. 니고데모에 대해 기록했던 사람은 요한 뿐인데, 그것도 세 번을 기록했다. 한 번은 3장에서 거듭남의 말씀을 주신 장면이었고, 7장에도 많은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평하고 죽이려고 할 때 반론을 폈다. 이제 세 번째 기록된 것이 이곳이다.

주님은 부자들의 묘실에 장사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는데, 백 근은 100파운드로 대단히 많은 양이다. 당시로는 가장 귀하고 비싼 향품을 넘치도록 마련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이 세마포도 아주 좋은 것이었으리라. 부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비록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가까이서 모시지 못했지만,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주님의 시체를 받아다 어루만지고 그 향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분명히 돌아가셨으며,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례까지 확실하게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단자들이 나타나서 ‘예수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장사된 적도 없다’고 주장했던가!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요한은 90세쯤 되었다. 영지주의자들 같은 이단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지만,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시고 어떻게 사람들 손을 거쳐 무덤에 안치되셨는지 분명하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마태는 27장 60절에 이 무덤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이라고 했고, 요한은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라고 표현했다.

그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 앞에 모여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갈지 모르니 잘 지켜야 한다고 했고, 결국 돌에다 인봉까지 해서 막아놓고 파수꾼이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을 더욱 확실히 증거하게 되었다. ‘헛되이 지키네’라는 찬송가 가사도 있듯, 그들의 노력은 소용없는 것이었다. 돌의 인봉도 헛되고 파수꾼도 헛되었다. 주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부활하실 때 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금요일 새벽 주님은 빌라도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오전 9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에 서너 마디를 하실 때 “다 이루었다” 크게 외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운명하셨다. 그것이 오후 세 시이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새 무덤에 안장했는데 이것이 금요일 저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안식일(토), 유대인들은 모여 시체를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인봉하고 파수꾼을 세웠다. 그리고 이제 20장은 토요일이 지난 후 주일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