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Y’Man International(국제봉사단체)에서 국제 여성총재 직책을 맡고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덴마크를 방문하였다. 해마다 그맘때면 수도 코펜하겐의 스트로이어트 거리에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 축제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그 걱정을 떨쳐 버리려 거리로 뛰쳐 나와 자유롭게 활보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과 여행객 모두 발 디딜 틈 없이 거리를 메우고 마치 물결처럼 인간 파도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축제라 해서 화려한 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나름대로 치장하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흥겨워하는 것이다. 격조 높은 콘서트는 없다. 단지 시에서 주관하는 판토마임, 인형극이 가설 무대에서 공연되고, 무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이 거리에 있다.

나도 지금 이 대열에 몸을 섞으며 흘러간다. 흐른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가다가 길이 막히면 인형극을 보고, 묘기가 끝나면 힘차게 박수를 쳐 주고 다시 대열에 섞여 걸어간다. 보행자의 천국이라고 하는 스트로이어트에서 왕립극장까지, 인파로 가득 찬 이 네 개의 거리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스트로이어트라고 말할 뿐. 스트로이어트는 걷는다는 뜻이다.

나도 걸어간다. 일 없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안데르센으로 분장한 구연가의 동화를 듣는다. 그의 말처럼 온 세상이 “…이를 데 없이 맑은 유리와 같다.” 스트로이어트에서는 구연자나 청중이나 악사나 모두 다 안데르센이다. 그가 떠난지 한 세기를 훨씬 지나는 동안, 수많은 애호가들이 또 하나의 안데르센으로 오늘을 살아가면서 덴마크를 영원한 동화의 나라로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14세 때 오덴세를 떠난 안데르센은 오늘 이 거리의 사람들처럼 왕립극장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대 감독 한 사람을 만나 작품에 출연한다. 시인은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쓴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 이름이 인쇄된 프로그램을 들고 집에 와서 타는 촛불 및에 세워놓고 밤을 세웠다. 무척 기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소년이 후일 세계적인 대(大)시인이자 덴마크 왕의 빈객이 된다.

안데르센이 드나들던 왕궁 주위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격조 높다. 콩겐스뉘토우 광장에 면해 왕궁과 왕립극장, 왕립예술관이 차례로 서 있다. 광장은 왕립예술학교 졸업생들을 축하해 주는 전통의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대학과 각 연구기관으로 진학하는 미래의 엘리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왕궁은 그들에게 덴마크의 또 하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스트로이어트 거리의 무명 악사들 속에 무수한 안데르센이 태동하고 있다고 기대한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오늘도 스트로이어트의 무명 예술가들 모두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청동 멧돼지 이야기 속의 거지 소년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더 큰 세상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청동 멧돼지 이야기’를 들어본다. 갈 곳이 없는 거지 소년이 한 공작의 궁에 달린 정원에서 소나무를 피난처 삼아 하루종일 앉아 있다. 소년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루 해가 지나고 어두워지면서, 문지기에게 쫒겨난 소년은 아르노 강가로 나왔던 것이다.

아르노 강 다리 위에 오랫동안 서 있던 소년은 물 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을 꿈꾸듯 바라본다. 반짝이는 별들, 장대한 대리석 다리, 델라 트리니티 광장,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 청동 멧돼지 쪽으로 걸음을 옮긴 소년은 몸을 웅크려 양팔로 멧돼지의 목을 감싸안는다.

그리고 나서 상추 몇 잎과 밤 몇 톨로 저녁을 먹고, 멧돼지의 번들거리는 주둥이에 조그마한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소년은 완전히 혼자이다. 멧돼지의 등으로 기어올라간 소년은 상체를 숙여 곱슬곱슬한 머리를 멧돼지 머리 위에 얹는다. 그리고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진다.

자정이 되었다. 청동 멧돼지가 꿈틀 데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멧돼지가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꼬마야, 꽉 잡아라. 이제부터 달릴 거니까.”

그러더니 정말로 돼지는 등에 소년을 태운 채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도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