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인요한 공동이사장(좌)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양병이 이사장(우)이 협약서를 교환하고 있다.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제공

1962년 건립된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이 시민들 모두의 유산으로 보존된다. (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사장 인요한, 이하 지기선보연)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사장 양병이, 이하 내셔널트러스트)는 1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 신탁협약식’을 열고,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을 내셔널트러스트 시민 유산으로 영구신탁하는 협약서에 최종 서명했다. 이와 함께 선교사 유적을 문화재청의 등록 문화재로 추진하는 데 적극 협력할 것임을 밝혔다.

신탁협약서는 신탁자를 지기선보연으로 하고, 수탁자를 한국내셔널로 하며, 선교사 유적지를 영구보존의 목적으로 하고, 일체의 매각·담보·저당 등의 행위를 할 수 없고, 문화재적 가치를 극대화 하며, 국립공원 지리산의 환경보존 의무를 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써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산 17번지의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의 건축물 12동이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 유산으로 신탁됨과 동시에, 협약에 의거해 지기선보연이 관리 및 운영을 맡게 된다.

기독교 선교사 유적의 건축물을 소유하고 있는 지기선보연 인요한 공동이사장은 이날 환영사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자유와 평등 사상을 전파한 선교사 유적에 문화재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면서 “종교적 자산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나 모든 시민의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인 이사장은 특히 “1939년 노고단 선교사 유적지에서 구약성서의 한글 개역을 통해, 보편화되지 않은 한글을 백성에게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남장로교회는 당시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철저히 반대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해 잘 보존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인 이사장은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독히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바꿔보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남다른 의지, 해외로 파견된 근로자들의 수고, 월남전에서 피를 흘렸던 이들의 희생,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앞을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소중한 문화와 유산을 돌아보면서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를 후손들에게 잘 전달해야 한다. 한국은 ‘좋게 한다’면서 과거의 것을 뜯어낸다. 그러나 좋은 역사와 나쁜 역사, 모두 있는 그대로 다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내셔널트러스트 양병이 이사장은 “지리산 선교사 유적을 자연과 문화유산 그리고 세대와 종교 간의 벽을 넘는, 조화로운 균형과 신뢰의 상징으로 보존하자”고 말했다. 이 유적은 앞서  201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최한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지기선보연 안금남 대표이사장은 “종교유적이면서 역사·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선교사 유적을 신탁하는 것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봉사, 그리고 그들을 위해 죽음조차 무릅썼던 선교사들의 정신을 닮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취지에 각계의 동의를 부탁하고, 등록문화재 지정과 보존을 위한 활동에 관련 정부기관, 자치단체, 시민사회단체의 협력을 요청했다.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은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국립공원 지리산 보존 의무를 준수하면서 관련 기관과 시민사회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보수 복원 및 운영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내셔널트러스트에 영구신탁 예정인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의 역사는, 1920년 초 노고단 일대에 휴양지를 세운 것으로 시작된다. 사명감을 안고 2~3대째 이국의 땅에서 삶을 이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말라리아와 이질 등의 풍토병에서 본인과 가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노고단에 휴양지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폐허가 된 노고단 휴양지를 대신하여 1962년 지리산 왕시루봉 일대에 지금의 선교사 유적을 재건하게 된다.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은 현재 10채의 가옥과 교회 한 채, 창고 한 채 등이 남아 있다. 주로 미국의 간이건축물 축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노르웨이 선교사에 의한 북유럽식 가옥, 영국·호주식 요소가 보이는 가옥, 주한미군에게서 구입한 콘센트 막사(교회) 등도 있다. 각 가옥들은 가족 단위의 단출한 평면을 가지고 있어 대개 2층의 구조이나, 지붕 밑의 다락방을 2층으로 사용하며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계단 대신 사다리를 설치했다. 장마철의 습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벽난로 외에는 난방 시설이 없음을 볼 때, 여름에 국한하여 이 곳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 유적 건립 당시 산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산을 깎아내는 절토 작업을 최소한으로 했다. 목재를 비롯한 철판·창호 등은 산 아래 도회에서 제재된 된 것들을 운반하여 사용함으로써, 주변의 수목 훼손을 최소화한 것도 특징이다. 그리고 한국의 건축 현장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프리 캐스트(Pre-Cast) 공법을 사용하여 기초, 기둥, 창대받침, 벤치, 야외 테이블 등을 만든 조립식 기법이 적극적으로 적용되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