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빌라도 앞에 서신 주님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이제 예수님은 가야바 대제사장에게서 관정(Pratorium)으로 끌려가셨다. 그들은 예수를 결박한 채 안나스에게로, 가야바에게로, 관정으로 끌고 다녔다. 관정은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이었다. 그 사이 마태·마가·누가·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을 다 기록해 놓았다. 요한 사도는 베드로와 항상 같이 다닌 사람임에도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던 것이다.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이것은 지켜보기도 너무나 힘겨운 광경이다. 주님은 전날 저녁 겟세마네에서 나오시면서부터 결박당하셨고, 밤새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보니 새벽이 된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새벽에 온 공회가 모여 사형 확정을 하고서 당시 로마 총독(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다고 했다. 주님은 밤새 잠을 못 주무셨다.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이들 유대인은 유월절 절기에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위법이기에, 자기들을 성별시키기 위해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하면서도 종교 교리를 지키는 데는 아주 열심인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엄청난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작은 교리 한두 가지 지킨다면서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 종교의 기득권 세력이 약화될까봐 미움과 시기로 가득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 빌라도는 어떠한가?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유대인들이 관정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려면 나가야 했다. 그는 관정 안 예수님과 관정 바깥 유대인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33, 38절, 19장 4, 9, 13절). 빌라도가 이렇게 들락날락하면서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능한 빌라도 총독은 소신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누가복음 23장에는 그 내용이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 였다. 또 이 사람이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고 있다고 빌라도에게 거짓 고소를 했다. 요한복음 18장에서는 빌라도가 먼저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백성들이 먼저 거짓 고소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그들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비방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민중을 소동케 하는 자로 고발한 것이다. 모두다 거짓 고소였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 정황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소동이므로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 편에서 이는 종교 분쟁으로 볼 수밖에 없기에, 이 문제를 맡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종교 문제 같으니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법대로 사형시키려면 총독부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야 하기에, 예수를 잡아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들이 총독에게 온 이유는 죄가 있나 없나를 가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여야 하는데 우리는 권한이 없으니 당신이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빌라도가 들어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한 구절을 왜 기록해 놓았는가? 그 배경을 잘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죽음을 예상하신 것이다.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의 사형제도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렇게 죽게 해 달라고 온 것이었다. 즉 형을 확정지으려고 온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상황이 간단하지 않음을 알았다.

빌라도와 주님의 대화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다지 존경하는 어투가 아니다. 헬라어로도 ‘너’라고 낮추는 말을 썼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이런 질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엄위를 갖고 계시다. 그분의 질문을 보라!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로마인의 자존심을 세우며 네 나라와 내 나라를 구분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지금 빌라도와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로마 제국이나 유대 민족처럼 눈에 보이는 나라만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3장에서 ‘나는 위에서 왔다’ 하셨고, 8장에서도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라고 하셨다.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빌라도는 주님이 하신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주님은 당신이 왕이 아니라는 말씀은 절대 하지 않으신다. ‘왕은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왕은 아니다’라고 하시자, 빌라도는 ‘그러면 왕이 아니냐’라고 한 것이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주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는 방식은 그들처럼 무력과 권력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선한 증거로 증거하셨다고 말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셨다는 말인가?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당신이 하실 말씀을 다 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증거이다. 당신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분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그 나라를 위하여 내가 났고 세상에 왔다고 하셨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하셨다. 진리에 속한 자는 주님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다. 나는 여러분이 진리에 속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이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 세상의 열국은 언젠가 끝난다고 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돌이 금신상을 쳐서 깨뜨려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리고 그 돌은 태산을 이루었다고 했다.

다니엘 선지자가 하는 말은 무엇인가? 결국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왕이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그 나라 구성원들은 진리에 속한 자인데,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진리에 대한 반응이다. 그 진리를 듣고자 하고 그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지키고 싶어 하고 그 진리를 사모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알려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나라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날 엄청나게 부러워할 것이다. 그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전하는 진리이다. 진리와 말씀에 의해 그 나라는 세워진다. 그래서 천국을 씨 뿌리는 비유로 설명하며,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뿌려 사람들 마음속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결국 주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구분선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란다.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he truth)?” 주님이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니, 빌라도가 이 유명한 한 마디를 던졌다. 이는 당시 집권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오로지 보이는 왕국을 어떻게 다스릴지만 관심했을 뿐, 주님이 그것을 위해 오셨고 목숨을 내놓는 진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 묻고 끝난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 에게 나가서 예수님으로부터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사람을 미워한다거나 죽이려 한다거나 하는 어떤 악한 것도 없음을 알았다. 주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니, 이런 종교철학 이야기 때문에 사형을 언도하고 죽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백성들을 두려워한 빌라도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여기서 ‘정치’가 개입되고 있다. 만일 빌라도가 참으로 공의롭고 지조있는 바른 정치인이라면, 죄 없는 사람은 무죄방면을 해야 했다. 그는 ‘죄가 없는 사람을 왜 데려왔는가’ 하고 소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빌라도는 성난 군중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였기에, 정치적으로 특사의 전례가 있었다. 죄인 중 한 사람을 풀어줄 수 있었다.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가 죄가 없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갑자기 죄인을 만들어 특사로 풀어주겠느냐고 제시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 이것이 의를 저버린 정치라는 것이다.

당시 민란을 획책했던 바라바라는 살인자가 갇혀 있었다. 빌라도는 종교적 분쟁과 시기가 사람을 얼마나 강퍅하고 사악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 중 누구를 풀어주는 것이 좋은가 물으면 예수를 풀어주라고 할 줄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어리석었다.

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죽이려는 마음 뿐이기에,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 채찍질을 하도록 했다(19:1). 죄가 없다 하고서는 채찍질을 했던 것이다(눅 23:13-14).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빌라도는 자기에게 데려온 예수를 묶인 채로 헤롯 왕에게 보냈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고 당시 갈릴리는 분봉왕 헤롯의 영지였다. 헤롯은 자기에게 끌려온 예수를 조롱하고 욕보인 후 빛나는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가 예수님과 대화한 장면이 18장 33-38절 말씀이다. 예수에게 죄가 없었기에 빌라도는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했다(눅 23:16).

당시에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은 먼저 채찍질을 당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해서 피가 많이 나고 참혹한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이 동정하고 풀어주라고 할 줄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악함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잡아 죽여야 속이 풀릴 사람들 앞에 이방 정치인은 그런 식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여러분이 과거에 성경을 많이 읽으셨겠지만,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없다. 또 여러분의 구주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채찍에 맞을 것을 아셨다. 돌아가시기 전 “저들은 나를 채찍질하고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다 말씀하셨다. 말씀하신 대로 채찍질을 당하신 것이다. 당시 채찍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가죽에 쇠를 박아 한 번 치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정도로 잔인했다. 나가서 피가 철철 흐르는 주님을 그들 앞에 보여준 것이다. “보라, 너희들의 왕이다.”

그러나 40절에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가복음에서는 “소리가 이긴지라”고 했다. 오늘날도 정치적인 사람들은 소리를 지른다. 검찰청사 앞에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왜 소리 지르는가? 전혀 문제 없는 사안들이 아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정치가들은 백성들의 여론과 폭동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잠잠하게 만드는 묘수를 찾는 것이 정치이다. 이 세상에는 참다운 ‘의’가 없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른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소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빌라도는 민중의 폭동을 우려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내어준다.

극심한 죄수 바라바는 석방되었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죄수로 잡히셔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분이 바로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구주이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예수를 믿지 않으려는가? 그래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려는가? 이 죄 없는 분은 순전히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사람들 손에 미움을 당하면서 잡혀 죽으셨다. 그것을 제자들은 분명하게 보고 기록하여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런 고난의 한 고비 한 고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답답하고 무서운 이런 순간을 주님이 당하셨다. 죽을 우리를 살리려 그분이 다 담당하시고 죽으셨다. 멸망할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그 죄의 짐을 담당하고 죽기 위해 이 모든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은 우리를 영 죽을 운명에서 살리실 뿐 아니라,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것도 원하신다. 주님이 채찍에 맞은 것은 우리를 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은 건강해야 한다. 여러분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 그분이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효과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주님이 왜 채찍에 맞으셨겠는가?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아야 되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치유도 받아야 한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간주되어서 십자가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신 주님!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여러분이 이 예수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