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가 최초로 자신의 팔십 평생을 돌아보는 대장정에 나섰다. 이어령 박사는 이재철 목사와 함께 올해 ‘인생’을 주제로 매달 한 차례씩 양화진문화원 주관 목요강좌에서 대담을 나눌 예정이며, 13일 오후 그 첫번째 문을 열었다.

이날 이 박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3년 태어나 일본인으로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심정부터, 해방과 6·25 전쟁을 겪고 만 22세의 나이로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우상의 파괴’를 신문에 연재하기까지 자신의 삶을 소개했다.

한 개인의 인생 통해, 시대와 역사 조망해 볼 것

이재철 목사는 이 같은 시도에 대해, “모든 계급이 공유하는 한 시대의 역사적 정신으로 개별 사건이나 개인을 해석하는 ‘심성사(心性史·historie des mentalites)’”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미시사(微視史·microhistory)’를 통해 ‘거시사(巨視史·macrohistory)’를 읽어내려는 시도로, 이 목사는 “우리는 이 선생님의 개인 인생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함께 조망하면서 대담을 나누겠다”고 했다.

▲이어령 박사(위쪽)와 이재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외로움 줄이기 위해 진짜 경험, 목소리, 얼굴 1년간 쏟아놓겠다
아버지·어머니에게 이성·감성 물려받아 지금의 ‘크리에이터’로

대담에 앞서, 이어령 박사는 “절대 자서전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박사는 “여러분들 머릿속의 저에 대한 정보와 실제의 저 사이에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큰 갭(gap)이 있는데, 이를 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외로움이자 슬픔”이라며 “이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히려고, 나이도 많고 하니 이번 1년간 제가 겪은 것, 제 진짜 목소리, 진짜 얼굴을 다 쏟아놓고 가기 위해, 이런 엄청난 ‘인생 대담’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제가 보통 머리를 염색하고 다녀 젊은 줄 아셨다가 이번에 하얀 머리를 보고 놀라시듯, 모든 걸 탈색하고 본 모습으로 여러분들과 이야기하면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며 “그것이 제 외로움을 줄이는 길이 아닐까 해서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재철 목사는 “선생님 말씀에 동의한다”며 “제 책을 많이 읽으신 분일수록 실제 저와는 다른 이재철을 생각하는 분이 계시던데, 실체와 책을 통해 얻는 정보의 차이 때문 아닐까”라고 했다. 이 목사는 “에세이스트, 학자, 칼럼니스트, 소설가, 시인, 극작가에다 초대 문화부 장관, 88올림픽 행사 연출, 새천년준비위원장,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 등 선생님을 수식하는 호칭이 참 많은데, 한평생 살면서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시고 수식어를 갖고 계신 분은 없지 않나 생각된다”며 “이 모든 걸 통틀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선생님은 크리에이터(creator), 창작자이셨다”고 말했다.

그는 “크리에이터는 사전을 보면 ‘창조주’라고도 돼 있는데, 그래서 선생님은 50년간 무신론자였지만 크리에이터에게서 많은 능력을 받으셨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으셨을까”라고 덧붙였다. 이어령 박사는 이에 대해 “아버지는 창조적인 것, 남이 안 하는 것,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아니면 못 참는 분이셨고, 어머니는 문학 소녀셨다”며 “아버지에게서는 좌뇌(이성)를, 어머니로부터는 우뇌(감성)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똑똑한 좌뇌와 우뇌가 있었지만 저는 둘 다 있어서 평론도 하면서 창작도 하고, 어려운 논리적인 글을 쓰면서 여성적 감성의 글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중 어느 것이 큰지는 몰라도, 절대 내 노력만으로 온 것은 아니고 아버지 어머니의 DNA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그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께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셨기에 중학교 때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할 형편이 됐다”며 “물질적 문제보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심성과 교양을 보고 자랐던 게 큰 복”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모태신앙이 중요한 것”이라며 “어머니 아버지가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범죄자 등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문화적 환경이) 같을 순 없다”고도 했다.

이재철 목사는 “하지만 당시 많은 지주나 자본가들이 있었고 세상적으로 좋은 집안의 자제들도 꽤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이어령 선생님 같이 되진 못했다”며 “말씀하신 대로 부모님에게서 타고난 은덕이 분명 있지만, 그 위에 후천적 노력이 없었다면 시대를 선도하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선생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령 박사는 “빈부의 격차나 물질적 평등은 가능할 날이 올지 모르지만, 문화나 교양은 절대 평등해질 수 없다”고 말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야스쿠니 신사, 군국주의자 찬양하는 곳… 국립묘지 아냐
구호·정치의 반일 아닌, ‘휴머니즘·인권과 자유’ 내세워야

이후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을 회상하며 오늘날의 일본과 우리나라 국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어령 박사가 설명한 당시는 잘 살든 못 살든 여성은 모두 ‘몸빼 바지’를 입어야 했고, 가치중립적인 용어 ‘소학교’는 황국 신민을 의미하는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이는 나치 독일을 본딴 것으로, 순수한 교육이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에 적응하게 하는 교육, ‘멀쩡한 사람 데려다 히틀러주의자 만드는 부품공장’ 같은 곳이었다. 사회와 국가의 이념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 이 박사는 “오늘 여러분들 모두가 각기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학교에서 제 이름은 이어령 대신 ‘모리야마 토시오’가 돼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말을 쓰는 아이들은 표를 빼앗기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고, 동요 대신 ‘전쟁터에서 꽃처럼 죽자’는 내용의 군가만 일본어로 불러야 했다. 메이지 유신 때가 돼서야 ‘성씨(姓氏)’가 생긴 일본에 의해, 5백년, 1천년 내려온 한국인들의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 박사는 “이런 경험들을 한 사람이 글을 쓰니 막강한 것”이라며 “노벨상을 탄 사람이 식민지와 독립, 전쟁을 모두 겪어봤을까”라고 했다. 그는 “불행한 시대인 줄 알았는데, 사실 저는 누이 따라다니면서 냉이를 땄으니 채집 시대부터 농경 시대, 산업 시대, 정보화 시대를 거쳐 바이오 시대까지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또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어령 박사는 “덮어놓고 일본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며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가 미국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라고 하면, 우리는 ‘야스쿠니 신사가 정말 국립묘지인가’ 라고 따져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묘지가 아니라, 천황제의 ‘국교(國敎)’, 국가 신도의 상징 중 상징인 천황을 위해 ‘만세’를 외치고 죽은, 충성심 높은 침략군들의 위패를 모아놓은 곳일 뿐이라는 것. 이 박사는 “美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이 모두 묻혀 있기 때문에 오바마가 가서 참배하지, 만약 남군 기독교인들만 모아놓았다면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이 그곳에 가겠느냐”며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국주의자를 찬양하는 곳이지, 영령들을 위로하는 장소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식인도 아닌, 일본 한 탤런트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독일 메르켈 수상이 히틀러의 무덤에 가서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며 “한국에서도 ‘왜 야스쿠니 신사가 알링턴 묘지인가? 일본의 국립묘지는 따로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일본이 거짓말로 호도하니 전 세계는 오히려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들에게 국립묘지 헌화도 못하게 하느냐고 비난했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은 ‘40년 후 몸 버린 값 달라고 한다’고 전 세계에 알리면서 오히려 우리 할머니들을 욕하고 있는데, 이 박사는 “거꾸로 왜 40년 만인지를 전 세계에 되물어야 한다”고 했다. 1960년대 한일회담 당시 할머니들은 30-40대였는데 당한 그들이 ‘끌려가서 정조를 뺏겼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 40년이 지나 부끄러운 것도 적어지고 남편·아버지까지 떠나고 나서야 외치기 시작했으며, 일본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으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려 한다는 말이다. “돈 몇 푼 받자고 아흔 살 노인들이 그렇게 외치시겠는가, 인권을 인정해달라는 것일 뿐”이라며 “일본이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당했던 일들을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다”고도 했다.

청소년의 눈으로 전 세계에 나치의 잔학상을 폭로한 <안네의 일기> 같은 작품인, 자신이 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를 소개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잃어버린 자신에 대해 적은 글로, 일제시대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게 아니라 철 모르는 아이가 겪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일장기 밑에서 최초의 교육을 받고, 일본 역사를 배우던 상처-을 담담하게 그려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제 글이 일본에 다 번역됐지만, 반일(反日)을 다룬 게 아니라 그저 암담한 어린시절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이 작품만은 절대 출판이 안 되고 있다”며 “이런 작품들이 일어로, 영어로, 불어로 번역되고 평가받아야 하고, 이것이 문학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우리는 구호의 반일, 정치적 반일, 정략적 반일에 익숙해졌지만, 피가 뚝뚝 흐르는 휴머니즘에 입각해 독일인이, 미국인이, 일본인이 읽어도 함께 눈물을 흘려 줄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같은 작품이 필요하다”며 “다시는 이렇게 못난 사람이 되지 말자는 다짐으로, 인간의 자유를 상실하고 조국을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이것이 퍼져야 우리의 슬픔은 창조가 되고 우리의 핍박은 찬란한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지, 이대로 가면 또다시 우리의 자녀들이 다른 이들에게 맡겨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