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한 제자만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후에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 사람들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전파를 듣고 장래 예수를 믿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지금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20절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말씀으로 설립되고 말씀으로 전해가는 말씀의 종교이다(이상근).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기도의 주제는 ‘하나’이다. 먼저는 11제자들이 하나되기를 먼저 기도하셨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전도를 받은 전 세계 모든 성도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분열된 교회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없고 외적으로도 참된 복음의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 성도들이 성삼위 하나님과 완전하고도 아름다움 하나를 이룰 때 하나님의 임재와 복음 전도의 미를 거둘 수 있다”(이상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니다. 하늘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이 땅에 성자 예수가 계시지만, 분명히 구별이 있다.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이 두 인격 간에는 하나가 있다. 서로 ‘안에’ 거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거한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영어로 ‘co-inhere’(서로 안에 거한다)고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한 하나를 갖고 계시다. 그런데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에는 성부 하나님(아버지)과 성자 하나님(아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이 있다. 성부와 성자는 원래 갖고 계시던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17장의 기도 내용을 잘 읽어 보면 결국 이 성자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 즉 택한 백성들을 성부에게로 이끄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이 성자는 중보자가 되셨다. 이 세상 가운데서 성부에게 이끌리는 가람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부른다. 성자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세상 가운데 한 무리를 택하셨는데, 그분은 이 택함받은 백성들을 성부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자의 일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지금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먼저 11명을 뽑으셨다. 그리고 그 11명이 확장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아버지께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하시는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해 달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뭔가 서로의 하나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처럼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것이 바로 21절의 내용이다.

성도들의 하나됨

이 기도에서 중점은 교회의 하나, 곧 성도들의 하나이다. 이 땅의 성도들이 분열되지 말고 하나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는 하나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오늘날은 유감스럽게도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별로 없다. 그러한 찬송곡도 별로 없다. 이 메시지를 전한 후에 부르려고 하나됨에 관한 찬송을 아무리 골라도 마땅한 가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경에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의 기도 속에는 하나를 강조하는 말씀이 많다. 초기 교부 시대에 클레멘트나 이그나시우스가 교회에 보낸 서신들을 보면(이 서신들은 외경 속에 포함된다) 거기에는 성도들이 다 하나되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교회들에게 호소하는 말들이 많다. 천주교까지는 하나에 대한 관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개혁교회는 분열된 이후 얻은 것도 크지만 잃은 것도 크다.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교회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약화되고 소홀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몸이 하나이니’,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등 하나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는데, 교회가 수많은 갈래로 나뉘고 나니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하신 간곡한 그분의 유언적인 기도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데 대한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하나는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적이고 조직적인 하나가 아니다. 교황을 머리로 삼은 그러한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은, 본질적이며 생명의 법에 속한 성령 안에서 누리는 하나를 말하지, 그러한 외적이고 종파적이고 조직적이며 인간 체계적이고 중앙정부적인, 사람들 보기에 하나라고 여기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외적이다. 오히려 성경에서의 하나는 겉으로 볼 때는 다양한 것이다. 그 나타나는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다고 했다. 이는 다양성 가운데서의 본질의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직분은 다르나 주는 같다고 했다.

이는 획일적인 하나도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는 것이 똑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하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였지만 단어를 쓰는 것, 용어를 쓰는 것도 다 똑같이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공산주의 같은 것이다. 행동하는 것도 똑같아야 하기에 심지어 자매들이 시장에 갈 때도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가지 행동을 똑같이 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하나가 결코 아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을 틀에 묶어 놓고 꼼짝 못하게 만들어 ‘하나를 지키라’고 하시는 그러한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숨이 막히고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그런 하나가 아니라 이 하나는 본질에서의 하나이며 생명에서의 하나이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또 이 하나는 어떤 교리상의 일치나 교회의 연합운동이나 지방적 입장의 동의를 통해 이룬 하나보다도 더 깊은 하나이다. 외면적인 일치나 정치적인 일치는 요한복음 17장의 사상과 거리가 멀다. 요한복음 17장의 하나됨은 지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실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것이요 생명에 속한 것이며 영원 전부터 하늘에 존재한 하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 하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를 만드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엡 2:13-16). 십자가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태초로 이끄는 일을 하신 것이다. 믿는 우리가 얻은 생명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은 태초부터 있는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원래 하늘에 하나가 먼저 존재하였다

하늘에는 성부와 성자 간의 기묘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한 무리의 교회를 부르셔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었던 그 하나를 확장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이 이미 존재하는 성부와 성자의 하나 안에 우리도 다 그 안에 있게 해달라고 하셨다.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듯 이 하나도 삼일성의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들은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하나를 이 땅에 확장하고자 하셨다. 이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아들은 십자가로 나아가기 전에 기도하셨다. 이 신비한 하나,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가 확장된 무리가 바로 교회이다. 그렇게 될 때에서야 21절의 하반절의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복음이 자동적으로 전파된다는 뜻이다.

17장 전반부에서 주님은 세상을 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쯤 와서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희 가운데 이 거룩한 하나가 나타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세상은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 내가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먼저 믿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주 안에서 참 하나를 소유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 주님이 성도들의 하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보면 성부는 성자에게 영광을 주었다고 했다. 성자는 제자들에게, 교회에게, 믿는 이에게 영광을 주었다고 했다. 성부는 아들에게 영광을 주었고 아들 성자는 믿는 자들에게 아버지께 받은 그 영광을 주셨다.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제자들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 많다(요 6:57). 성자는 마치 성부의 제자 같다. 우리는 마땅히 성자의 제자이다. 성자는 이처럼 중보적인 역할을 하셔서, 택함받은 성도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심으로 그분과 다 함께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는 매우 비밀스럽다. 이 땅에서 죽고 썩고 망할 수밖에 없는 하찮은 인간들 가운데 한 무리를 선택하셔서 영원 전부터 하늘의 영광과 거룩함 속에서 누리던 특권을 부여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성자 예수이시다.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한 것처럼, 성자는 교회를 사랑하셨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 결국은 한 아들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서 원래 한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과 영광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심으로 자신은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 많은 아들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역사를 하시는 분이 바로 성자이시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관대,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이렇게까지도 우대하시는가?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감당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 계시고 또 기도하시는 것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 영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영광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혜, 진리, 다 영광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최고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하나님과의 일치는 단지 공존이 아니라 거기에는 영광의 분여가 있고(22절), 사랑의 교류가 있다. 이런 복스러운 일치는 곧 세상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성도의 진정한 증거이며 빛이 되는 경지이다”(이상근).

때로는 성도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참 귀하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귀한가’라고 느낀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영광은 성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밖에 없다. 성도들 안에도 내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귀한 것이 있음을 서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광을 누가 주었는가? 원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셨던 것을 아들이 우리에게, 믿는 자들에게 주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이 하나의 모양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거하는 것 같은 그러한 하나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를 위해서 우리 주님이 기도하셨던 것이다. 오늘 교회가 가져야 할 하나, 성도가 서로 누려야 할 하나는 바로 이러한 하나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사모함은 여러분이 항상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다. 나도 여러분 마음 속에 있기 원한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에 있기에 항상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마음도 없으면서 서로 하나되려고 애를 쓴다면 그렇게 하나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단어로 볼 때는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뜻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말씀을 100번 읽고 나서 뜻이 통하는지 보기 바란다. 이는 참 말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라고 했다. 결국 성도들이 온전함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가? 믿는 이가 온전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갈 2:20).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안에 모시고 살며 그에 더하여 많은 성도들과 하나로 일치되는 상태가 온전하게 되는 길이다. 개인적인 영성이 좋다고 해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많은 성도들이 한 몸으로 온전히 건축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되고자 할진대 교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성도들과 함께 하나되어 전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함을 얻지 못한다.

하나됨의 비결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기질도 다르고 배운 것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데 여러분과 내가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 안에 사실 때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기에 하나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사신다면 어찌 하나될 수 없겠는가? 여러분의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늘 거하는 것이며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의 필요이고 나의 필요이기도 하다. 그럴 때 여러분과 나는 쉽게 하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살면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행동, 여러분의 말이 다 그리스도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되도록 연결시켜주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그것은 복음이다.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증거도 하나가 되어야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가? 복음과 사랑은 성도들이 하나됨으로 전파된다. 그러나 중세 천주교를 보라. 그러한 거창하고 중앙 집권적인 조직적인 하나로 복음과 사랑이 세상에 알려졌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도리어 더 혐오감을 가졌다. 그러므로 사려 깊은 사람들은 그런 조직이 틀렸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기도하신 하나는 도대체 어떤 하나인가? 그야말로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이고 조직적인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내적인,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바 그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의 그 생명이 17장에 와서는 확장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하나는 그 생명의 확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생명 안의 하나 외에 다른 하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