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2013년 9월 22일 파키스탄 북부 즉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페샤와르의 역사적인 교회인 올세인트교회에서, 과격파의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올세인트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은 때와 비슷한 때인 130년 전 1883년 12월 27일에 영국 성공회의 파송을 받은 휴(Rev T.P Hughes) 선교사와 주크(Rev. Worthington Jukes) 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불모지인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사이에 ‘예배와 선교’를 위해 설립됐다. 유일하게 모스크 스타일로 건축한 후, 건물 맨 위에 십자가를 세우려다 9명이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순교자 교회”이다. 그래서 마치 초기 조선교회가 지녔던 것과 같은,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이웃 사랑에 전념하는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웃 무슬림들에게는 물론 테러를 감행한 과격파들에 대해서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사실 테러를 당했을 때 주변의 많은 무슬림들이 찾아와서 희생을 당한 사람들과 유족들을 위로하며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폈다고 했다. 저들이 항상 무슬림 이웃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왔기 때문이었다. 올세인트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적인 교회이다. 한국의 정마태 선교사가 협동목사로 사역을 했고 지금은 페샤와르노회 감독대리(Bishop’s Commissary)로서 수고하고 있는데, 교인들은 물론 현지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정마태 선교사는 지난 20여년 동안 온 몸과 마음을 쏟아 바치면서 무슬림 선교사역에 종사하고 있다

페샤와르는 지금도 위험 지역으로 외국인의 방문을 제한하고 있다. 교회 주변은 물론 곳곳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동휘 목사님과 정마태 선교사와 내가 (동행할 예정이던 이정익 목사님은 병으로 인해 동행하지 못했음) 라호르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30여 한인 선교사들과 식사와 교제와 격려의 시간을 가진 다음 페샤와르를 향해서 떠나려고 했을 때, 선교사들이 우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조심하라는 말을 했고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울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이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고 “거기는 왜 가시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세 사람은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페샤와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탄 것은 반갑게도 대우 버스였다. 6시간 동안 달린 고속도로는 한국의 그것보다 멋졌다. 그 고속도로의 절반 이상을 대우가 건설했는데, 파키스탄에서 가장 좋은 고속도로라고 했다. 대우가 파키스탄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높이는 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우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더 한다. 내가 2005년 12월 아프가니스탄 무라취드에 한국교회가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꽉 막힌 아프간 국경을 밤에 혼자 뛰어 넘어가서 군인에게 붙잡힌 일이 있었다. 국경 수비대장 들라워 장군과 이야기하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내가 아프간 어린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학교를 하나 세워주었고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며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왔는데, 나와 타직 국경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내 말을 한참 듣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우 넘버 원, 현대 넘버 원, 코리아 넘버 원, 노 프로블럼, 오케이.” 그리고 나는 물론 타직 국경에 남아 있던 정정섭 장로님과 기아대책 직원들이 국경을 넘어오도록 트럭 한 대까지 보내주었다. 아프간이나 파키스탄이 미국은 싫어하면서도 한국은 좋아하도록 배경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대우와 현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니면서 페샤와르에 도착했다.

페샤와르에 도착하자마자 올세인트교회로 달려가서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교회의 담임목사와 노회의 감독과 올세인트교회의 성도들이, 보안이 어려운 지역에 자기들을 찾아온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예배의 분위기가 순수하고 뜨거웠다. 내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는 주제로 간단하게 위로와 격려와 도전의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부르짖었고, 욥과 다윗이 고난을 당하면서 부르짖었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엘리 엘리”라고 부르짖으셨고, 사도 바울이 고난을 당하면서 부르짖었고, 조선교회가 고난을 당하면서 부르짖었는데, 이와 같은 모든 고난들이 죄인들로 하면서 울면서 회개하게 만들었고, 결국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위로와 복을 받게 했는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위로와 복을 받게 했는지 모른다는 말도 했다.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을 경청하는지 모른다.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가난과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원망 불평 불만을 품는 대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이웃과 박해자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품는 모습이 매우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 너무 부요해지고 너무 편안해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가난과 고난의 복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통역을 하던 정마태 선교사는 울먹이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동휘 목사님은 “마라나타”를 주제로 재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박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뜨겁고 간절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예배 후 아빠를 잃은 자녀들, 남편을 잃은 아내들, 친척들과 성도들, 눈을 잃은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위로와 사랑을 나누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스티커도 나누어 주었는데 아주 좋아했다.

저녁예배 후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모인 노회 지도자들 60여명을 만나서 교제와 위로와 격려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분들 중에 성 프란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있는데, 그분들이 이런 고백과 소원을 지니고 살다가 죽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정마태 선교사를 통하여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삽니다. 나는 고난을 스승으로 삼고 삽니다. 나는 고통과 죽음을 자매로 삼고 사랑하면서 삽니다.” 나는 손양원 목사님이 나환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하면서 살았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기를 간절하게 소원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너무 부족한 죄인이지만, 나도 그런 길을 걷다가 죽게 되기를 바란다는 고백도 했다. 험프리 피터스(Humphrey Peters) 감독을 비롯한 노회 지도자들과의 만남과 교제는, 말로 하는 형식적인 만남과 교제에 그치지 않고 진지한 본질적인 만남과 교제로 이어진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피터스 감독은 우리들이 안전하고 경비가 엄한 호텔에서 묵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모든 것이 고마운 것 뿐이었다.

우리는 밤 늦게,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감독 등 교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대화하면서 저들의 소원과 기도와 비전을 들을 수 있었다. 130여명의 순교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올세인트교회당 마당 한 곳에 “평화의 집”을 건축하려고 한다고 했다. 4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3층으로 된 자그마한 집을 건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 안에 평화의 정신을 선양하는 조그만 도서관을 만들고, 평화의 정신을 전하는 강의실을 만들고, 누구나 와서 평화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만들고, 이웃 무슬림 환자들을 치료하고 구제하며 상담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페샤와르를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소원과 제안을 전했다. “평화의 집”을 건축하는데 그 건축비의 일부를 한국교회가 부담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도서관 안에 다음과 같은 작은 방 7개를 마련하고, 거기 해당하는 서적들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는 130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희생(Sacrifice)의 방, 둘째는 화해(Reconciliation)의 사람(또는 지도자) 지나 대통령(파키스탄 국부로 존경받는 첫 대통령)을 기리는 방, 셋째는 평화(Peace)의 사람(또는 사도) 성 프란시스를 기리는 방, 넷째는 복음(Gospel)의 사람(또는 사도) 빌리 그래함 박사를 기리는 방, 다섯째는 연합(Unity)의 사람(또는 사도) 존 스토트 박사를 기리는 방, 여섯째는 사랑(Love)의 사람(또는 사도)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는 방, 일곱째는 섬김(Service)의 사람(또는 사도) 한경직 목사님을 기리는 방.

우리는 페샤와르를 떠나 다시 대우 버스를 타고 6시간 걸려서 라호르에 도착했다. 우리가 라호르에 도착했을 때, 한인 선교사들 30여명이 다시 한 곳에 모여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과 한 번 더 만나서 교제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비행장으로 떠나기 전 3시간 동안 나는 “인생 7도” “복음 3도” “해변 7언” “신앙 6도” “눈물의 감동” 등등의 주제로 간단하게 고백적인 이야기를 했고, 오늘의 한국교회보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이동휘 목사님은 순간순간 목회와 선교 사역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도전을 주셨다. 아주 착하고 겸손하고 따뜻하고 귀한 분이시다. 이번에 귀중한 선교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어려운 지역에서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마태 선교사를 비롯한 모든 한인 선교사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테러로 인해 극심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는, 올세인트교회를 비롯한 파키스탄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사랑과 복이 더욱 더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께서 파키스탄교회를 위해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펴시기를 부탁드린다. 파키스탄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지만 한국에 대한 감정은 좋은 것 같다. 한국교회가 과격파에 의해 테러를 당해 슬픔과 아픔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파키스탄 교회에 따뜻하고 친밀한 교제와 격려와 협력의 손길을 펼 수 있다면, 그것이 파키스탄 교회에는 물론 한국교회에도 귀중하고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그래서 가난과 고난 중에서 피어났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십자가 복음의 꽃이 다시 새롭게 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키스탄의 기독교 신자들이 국민의 3%라고 하는데, 1% 미만인 일본에 세 배 이상이 된다. 파키스탄에 있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과격파가 아닌 온건파라고 한다. 파키스탄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인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이 사실을 바로 알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선 한국교회가 테러로 인해 슬픔과 아픔을 당한 파키스탄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평화의 집”을 건축하는 데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솔직히 말해서 테러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저들은 경제적인 도움을 거의 요청하지 않는다고 정마태 선교사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회의 집” 건축비의 일부를 제공한다면 아주 귀중한 감동이 일어날 것이다. 형편에 따라서 백만 원 이상씩, 오백만 원 이상씩, 또는 천만원 이상씩 후원할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둘째로 손양원 목사님과 관련된 서적들과 한경직 목사님과 관련된 서적들을 보내주시면 많은 감동이 그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를 원하시면 본인 김명혁 목사나 정마태 선교사에게 연락하시기 바란다. 부족한 사람을 이곳저곳으로 보내시며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부족한 사람을 늘 사랑으로 후원해주시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슈 끄리아” 감사합니다.

2014년 1월 17일 파키스탄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김명혁 목사 드림(사무실 전화 번호: 02-2040-6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