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5. 성화의 삶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화의 삶 가운데 임재하신다. 그리스도는 성결, 자족, 겸손, 기쁨, 감사, 소망의 삶 가운데 임재하신다.

1) 성결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딤전 5:22).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부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의, 경건, 믿음, 사랑, 인애, 온유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우리가 성결한 삶을 사는 것 만큼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실하고 선한 증언은 없다.

2) 자족의 삶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은 원망하고 불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항상 자족하는 삶으로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성화의 삶을 얻는 데 큰 이익이 된다. 바울은 증언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자족의 이유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주가 있은즉 족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사도 바울은 자족의 삶을 사는 비결을 체득하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거기에 족하게 여겨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우리의 소망이 부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있으면, 우리는 삶의 자족을 배우고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하는 마음으로 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족의 마음에 같이하신다.

3) 겸손한 삶

그리스도는 우리가 겸손한 삶을 사는 가운데 우리와 같이하신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웃의 즐거움과 슬픔에 동참해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인간관계에 있어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낮은 마음을 품고 지혜로운 체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허영을 버리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주님은 이러한 겸손한 삶의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모든 일에 겸손하게 섬길 때, 주님께서 때가 이르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

4)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망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염려가 없는 삶이다. 감사하는 삶이다. 기뻐하는 삶이다. 소망하는 삶이다. 기쁨과 감사와 소망은 성도의 영적 삶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1) 기쁨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그의 마음 속에 계시기 때문에 기뻐한다. 구원받아 영생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기쁨이 넘친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면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성도는 어느 좋은 일에만 기뻐하지 않고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한다. 그리스도가 그 속에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2) 감사

기쁨의 삶은 감사의 삶과 같이 간다. 주님이 우리를 대속(代贖)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빚진 자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특정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감사의 제사를 흠향하신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리고 우리의 감사는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권면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권면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3) 소망

주님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소망스러운 삶 가운데 같이하신다. 우리의 소망은 영생에 대한 소망이며, 그가 주실 영원한 기업에 대한 소망이다. 이것은 신령한 것으로, 이방인들은 알지 못하는 풍성한 소망이다. 우리의 소망의 원천은 바로 우리를 그의 형제가 되게 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6. 화목의 삶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화목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신다. 화목의 삶이란 용서하고 화평을 심는 삶이다.

1) 용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에 이러한 용서를 가르치셨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때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신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원수를 맺지 않고 인간적으로 자기가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는다.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준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자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이다.

2) 화평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의 삶 가운데 같이 계신다. 그리스도인은 화평과 화목의 삶을 산다.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형제와 분쟁 가운데 있는 자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신다. 예수님은 제사 드리기 전에 형제와 송사에 있는 자는 먼저 화목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바울은 성도들은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사도 바울은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며,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5).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화평하는 일에 힘을 쓰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도록 힘을 써야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8-19). 화평을 이루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화평의 주로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7. 정의로운 삶

그리스도는 신자의 정의로운 삶 속에 현재하신다. 정의로운 삶은 나눔, 섬김, 구제의 삶이다.

1) 나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나눔이란 중요하다. 가진 자로서 결핍한 자들과 물자와 재능을 나눌 때 그리스도는 기뻐하신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헌금을 거두어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5-26).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의 이방인들이 복음을 유대인으로부터 전도받아 영적 혜택을 입었다면 소아시아의 이방인들은 저들이 가진 물질의 풍요함 가운데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나누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한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고 너그러운 자가 되는 것이 장래 천국에서 참된 생명을 취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2) 섬김

그리스도는 우리의 섬기는 삶 가운데 같이하신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 가운데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각 이웃을 섬겨 이들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3) 구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구제하는 가운데 현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시기 때문에 구제하는 자는 은밀히 해야지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이미 사람들로부터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구제를 할 때는 은밀히 해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이다. “구제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필자가 3년 6개월 전인 2010년 6월부터 젊은 목회자와 학자들과 함께 시작한 샬롬나비운동(샬롬을 꿈꾸는 나비 행동)은 개혁신앙을 우리 사회에서 실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적 삶 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고자 실천한 청교도들의 삶을,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매일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과 동료들에게 감사하고, 배려하고 함께 나누고, 사랑하며 서로 섬기자”라는 실천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민운동의 실천 강령은 “감사하자, 나누자, 섬기자”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얻은 칭의는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는 칭의의 열매인 성화를 요구하고 계신다.

8. 사랑의 실천

그리스도는 사랑의 실천 가운데 함께하신다. 사랑의 실천이란 이웃 사랑, 지극히 작은 자 도우기, 모든 덕스러운 삶 실천이다.
 
1) 이웃 사랑

그리스도는 이웃 사랑 가운데 함께 계신다. 하나님 사랑의 표현은 이웃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빚을 지라는 것이다. 율법의 내용은 이웃 사랑에서 충족된다. 사랑은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사랑하는 자는 간음, 살인, 도둑질, 탐냄 등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의 사회윤리학자 라이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사랑은 정의의 완성이요, 충족이라고 하였다.
 
2) 지극히 작은 자 돕기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신자의 행위 가운데 현재하신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를 주는 자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마지막 날 심판의 예를 드시면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하신다. 영생의 복을 받을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때 영접하였고, 헐 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의인(義人)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자기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 주님의 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른 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고, 헐벗은 것을 보고 입혔으며,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느냐고 반문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 –39). 이에 대하여 주님은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나사렛 예수는 오늘도 자신을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신다. 이것이 강자와 부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의 편에 서시는 그분의 사랑이요 겸손과 정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이 사랑과 겸손과 정의를 조금이라도 실천하기를 노력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다.

3) 모든 일에 덕스러운 삶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모든 덕스러운 삶 가운데 현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은 모든 참되고,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하며, 덕스러운 일을 하라고 권면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신자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운 바를 행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하신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우리들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쓸 때 천사를 영접하게 된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이 모든 일이 덕스러운 일이다. 성도들은 범사에 온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착은 마음과 선한 행실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맺음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오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신자의 믿음의 삶, 칭의와 성화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믿음의 삶이란 기복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의 삶 가운데 실현되도록 추구하는 삶이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이제 이 글은 종결에 가까왔다. 여태까지 역사적 예수에 관해 글을 써왔던 필자는 이 글을 머리로만 상상적으로 써왔던 것이 결코 아니다. 필자는 많은 성경구절과 신학책을 인용하면서, 그동안 많은 글들을 역사적 예수의 진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써왔다. 이 글을 쓴 필자에게 역사적 예수는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에 대하여 필자는 나의 삶에서 경험한 그리스도 임재를 잠깐 간증하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삶의 경험이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선행적인 삶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성경과 교회의 전통이 전해준 역사적 예수를 바로 믿게 한 원동력이다.

필자의 일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 특별한 4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 동네 친구들과 같이 해수욕을 갔다가 한 친구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구하려다가 그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나도 같이 엉켜서 익사 직전까지 갔다. 마침 지나가던 어느 생면부지의 아저씨가 우리를 구해주었다. 둘째는, 1988년 수원 합동신학대학원 교정에서 열린 박윤선 박사의 장례식에 참예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오다가 피곤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졸아서 도로 중간 구조물에 부딪친 고통사고를 겪었다. 얼굴에 많은 피를 흘리고 가슴과 갈비뼈에 부상을 입었으나 주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다. 셋째는, 1996년 직장암 수술을 받아 18cm나 잘라내고 6개월 간 항암제를 맞는 어려움 속에서 주님은 나를 완치해 주셨다. 넷째는, 2012년 미주에 갔을 때 멕시코 휴양도시인 캉컨 해변에 이안류(離岸流)가 흐르는 위험한 곳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순간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주님은 해안 경비요원에게 발견하도록 하여 나를 구원해 주셨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생길에 위험한 순간마다, 주님은 나의 손만 쥐고 동행하신 것이 아니라 안고 가신 것을 기억한다. 주님은 항상 성경 말씀과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나에게 그 임재를 알게 하신, 숨어 계신 인격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요, 2천 년 전에 오셨고, 앞으로 곧 오셔서 역사의 갈등과 부조리와 자연과 우주의 오염과 파괴를 해결, 심판,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필자가 알고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