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문이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고 작품을 읽고 또 창작할 때도 이것은 늘 내면의 화두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잠시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의 문학과 마주하면 결국 문학 활동은 한 독자의 관점으로 그 정의가 요약되는 것 같다. 한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내 삶은 그 작품을 통하여 어떻게 풍요로워졌는지 , 그리고 문학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등을 통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문학의 숲’이라는 글의 주제를 택한 것은 문학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우정을 쌓아가며 함께 여행을 하였는지, 오랜 세월 동안 내 속에서 꽃피고 영근 그 열매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는 의도에서이다.

물론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인간의 모든 활동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일이 나에게 지극히 유쾌하고 또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언어의 행간을 통해 일어나는 무수한 만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없지만 문학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은 그 자체의 살아있는 말을 갖고 있다.

강물과 풀잎과 바람도 그들만의 생동하는 말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몸으로 말한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곧 그들 몸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뉘앙스와 그 이미지로 인해 더 의미가 있고 즐거운 만남을 경험하는 일이다. 언어의 생명력이 주는 은혜를 누리는 것, 이것이 곧 문학의 힘이라 여긴다.

전제한 것처럼 문학도 인간의 모든 활동 중 하나라면, 인간의 활동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듯 작품을 읽고 쓰는 일에도 선함과 악함이 존재할 수 있다. 이 말은 가치 있는 작품들, 음악이나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들이 불후의 명작이라 하더라도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모두가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아닐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나치 당국자들도 여가 시간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고 한다. 그들은 낮 동안 처참하게 유태인을 학살하고도 밤에는 브람스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고, 베토벤을 들으면서 삼페인을 터뜨렸다. 위대한 예술 애호가들이라 해서 그들의 행위가 모두 다 선하고 예의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학은 분명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주지만, 문학 자체가 미와 선을 구현하지는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 자체가 미와 선을 구현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은 외국 문학을 전공하고 작가로서 글을 쓰는 동안 항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두 가지 큰 과제와 부딪히게 되었다. 어떻게 나의 기독교 신앙을 문학 작품 속에서 구상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내가 공부한 작품들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두 가지 문제였다.

좀더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의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과 실상을 문학을 통해 규명해 보려는 열망이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는 문학의 숲도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싶었던 것이다.

신학대학교에서 기독 문학을 강의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을 대립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 중에도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창작되는 문학 작품은 기독교의 교리나 교훈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 아닐까 하고.

바로 이러한 관심과 의문들에 대하여 문학적으로 접근한 글들로 나의 기독 문학세계는 형성되었다. ‘문학적 접근’이라 함은 학문적 이론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문학을 통해 내가 만난 사람들과의 로맨스를 통하여 창조 세계의 신비를 느끼며 그 기쁨을 나눈다는 뜻이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창조주의 마음을 미학적 언어로 형상화하려는 것은 그 사랑의 생명력을 확산시키려는 의도이다.

문학 작품이 어떤 의도에 의해, 특히 종교적 의도 같은 것에 의해 창작될 때에 그것이 얼마나 메마르고 사변적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미학’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문학의 존재 이유인 때문이다.

문학 속의 마른 풀잎과 거친 바람들 사이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사물들의 몸짓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거기에 거하시는 당신의 사랑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문학은 바로 이 생명들의 행간을 읽어가는 작업이다. 그 유쾌함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주저 없이 문학의 숲을 하나님과 함께 거닐 수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문학의 숲을 거닒으로 문학은 내 삶에 더 빛나는 열매가 되고 찬란한 향기가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문학의 숲을 거닐도록 도우신 은총을 감사하고 이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음을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