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곳 개신교회는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축도를 하면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이 손을 들고 합창을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있을지어다” 사역 초창기에 한국인 사역자들은 이러한 축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축도를 하다가 멈춘다. 이상하게 생각한 성도들도 따라서 멈춘다. 그 때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면서 축복기도를 마친 적이 있었다. 작은 에피소드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이 축도문, 너무나 보편합리화를 시켜버린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것이 기독교 문화로 정착하여 모두가 함께 자기에게 스스로 복을 빌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학적으로 강력하게 틀렸다고 주장하다가 세월이 흐르니 그것을 봐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하면서.

2. 아직도 이곳 현장의 교회는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서 예배한다.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종교적인 경건성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아주 효과적인 듯하다. 처음에는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문화적인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시대에 한정된 문화였으니 이제는 다 벗으라고 하였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현장을 무시한 문화 제국주의적인 발상, 본국에서 배운 교회의 문화를 그대로 전수하려는 무식한 태도임을 깨닫고 현장의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3. 지금도 여전히 현장의 교회들은 기도할 때에 삼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신학생들에게 그것은 틀렸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사역자들 앞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삼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저들 스스로 문화와 지식 속에서 갈등이 생기게 된다. “어릴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구하고 말하기에 부모가 스스로 알아서 다 해석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잘못을 말하고 틀리게 말을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닌가?” 라면서 가르친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해하면서 고쳐나가고 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4. 성찬식을 행할 때에 있었던 일을 다시금 회상한다. 어떤 할머니가 예식에 참여하여 빵을 먹고, 작은 금잔을 든다. 그러더니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키더니 입안에서 맛을 음미한다. “와우~ 맛있는데”라더니, “목사님, 한 잔 더 가능합니까?” 질문을 한다. 한껏 경건함과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면서 예식을 진행하고 있는데 한 잔 더 달라니,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는가? 어이없는 웃음을 꾹, 참고서 엄숙하게 작은 손짓으로 얼른 지나가라고 한다. “할 수 없지” 중얼거리면서 지나간다. 그 다음 할머니가 역시 잔을 흠향하고 나서 몇 번 코 주변으로 돌린다. 그리고는 훌쩍 들이키더니 입맛을 다신다. “와우 맛있다” 하면서 이제는 나에게 십자가 성호를 그어 감사를 표한다. 어, 어, 손 사래를 친다. 이게 뭣인가? 이미 자기 할 일을 다하고 합장하며 감사하다 하면서 들어간다.

현장문화를 경험하고 배워야 한다

이러한 경험들을 하면서 현장의 교회와 신앙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오해가 일어난다. 모든 사역은 그 나라의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발생한다. 문화의 이해는 신체를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의 신체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만큼, 우리는 효과적으로 신체를 관리하고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표면적으로는 문화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적어도 자기의 생활과 안정된 삶에 있어서는 그렇다. 그러나 생각이나 감각적으로 그 문화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하여 마찰이 생기고, 한국인의 문화를 이양하려는 권세 아닌 허세를 부리게 된다.  현지인들이 얼마나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의기양양하며 어떤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부리는 아집을 나타내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역자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습관이나 예배형식을 자기가 아는 기준으로 고치고 싶어 안달한다. 그것은 틀렸다. 잘못되었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고쳐지지 않으면 말을 안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분을 상하고 화를 낸다. 그러나 우리도 사실을 모르고 혹은 서구의 유산을 그대로 전수받아 그것이 오직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많으니 알고 보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리라고 여기던 형식들이 변하여 우스운 것이 되는 일들이 많다. 외적인 환경이 바뀐 것이다. 요즘도 주일성수 개념을 따라서 주일엔 TV도 보지 않고, 공부도 하지 말고, 물건을 사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고수하는 보수가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주일 밤 12시가 되기까지 이리저리 침대에서 뒹굴다가 12시가 되면 책상 앞에서 앉아서 월요일에 있을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이게 뭐 하는 것인가? 생각의 고루함과 편협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현장에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감히 변화를 시도할 수가 없다. 현장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다 보면 진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도 인내를 가지고 기회를 보아야 한다.

본질을 외면하고 부차적인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 이유가 없다. 너무나 진보적인 것도 진리를 상실할 수 있어 안 되지만, 너무나 보수를 고집하고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그 역시 큰 실수를 할 수 있게 된다. 넓게 바라보고 진리를 진리답게 할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이 시야를 넓히고 바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을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을 현장 속에서 배우게 되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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