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그리스도인이 사는 매일의 삶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칭의의 삶이요, 이 칭의(稱義)가 입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삶으로 실천되는 성화의 삶이다. 이 칭의와 성화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항상 신자의 마음과 삶 가운데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계시지만 성령으로 믿음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 같이 계신다. 이것은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동시성(Gleichzeitigkeit)이다. 동시성이란 2천년 전의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현재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 속으로 들어와 과거가 지나간 시간임을 그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동시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성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는 교리적이고 사변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삶의 여로(旅路) 가운데 택한 자와 같이 하시고 어려운 역경 가운데는 택한 자를 안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이 영위하는 매일의 생활은 칭의와 성화의 삶이다. 이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건생활, 순결한 가정, 원만한 사회생활, 복음의 전도, 성결의 삶, 화목의 삶, 정의로운 삶, 사랑의 실천이다.

1. 경건 생활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매일의 경건생활이 행하는 말씀의 묵상, 기도의 삶, 찬양의 삶 가운데 같이 하신다. 경건생활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稱義) 사건이다. 내가 역사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중생하여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칭의 사건에서 경건생활은 시작한다. 이것은 은총의 사건이요 역사적 예수께서 더 이상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내 삶을 새롭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로 만나는 사건이다.

1) 말씀의 묵상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 그는 신자가 그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계신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상).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시도록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 받으실 때, 40일을 주리신 가운데서 사탄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받는다. 이에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대답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다. 우리는 육신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떡은 우리들이 매일 먹어야 할 말씀의 떡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고 권면한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의존하여 이길 수 있다. 구원의 투구는 믿음,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 사탄이 던지는 모든 유혹의 화살과 시험을 능히 이기고 무찌르는 능력을 갖는다.

2) 기도의 삶
(1) 개인의 기도

역사적 예수는 우리 각 개인의 기도 가운데 임재하신다. 지상적 예수는 우리에게 은밀한 기도의 방법을 다음같이 가르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6-7).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해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좋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가르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가르쳤다.

(2) 가정, 교회, 친구, 사회와 국가를 위한 기도

우리의 기도는 나 개인에게 머물러서는 안되며 가정, 교회, 친구, 사회, 국가로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무속적 신앙의 기도는 나와 내 집단에 머문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는 나 자신과 가정의 번영과 행복이 아니라 이웃과 민족과 나라를 위한 것에 있다. 자신의 행복과 조직 구성원만을 위한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이나, 참 하나님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실현되도록 드리는 기도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 다니엘, 느헤미아, 에스라 등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한 자들이다. 본회퍼가 말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다. 타자는 내가 속한 사회와 이웃을 말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지 않는 교회는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3) 찬양의 삶

그리스도는 찬양의 삶 가운데 임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권면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 3:16하).
찬양이란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찬양은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통합되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영원 전에 나 자신을 선택하여 주신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최고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찬양의 기도를 흡양하시고 기뻐하시고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해주신다. 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오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소명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며 우리 속에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2. 순결한 가정

그리스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부부생활과 원만한 가족생활 가운데 같이 하신다.

1) 하나된 순결한 부부생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하나된 순결한 부부생활 가운데 임재하신다. 부부가 하나됨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순결한 부부생활이란 사랑과 복종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돌보며 섬기는 결혼생활이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8-19).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진정한 부부관계는 상대방을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처럼 여기는 친밀한 관계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부의 하나됨의 신비를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서 각 신자를 그의 신부로 맞이 하시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사건이라고 가르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3-25). 그리스도는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순결한 가정의 삶 속에 임재하신다.

2) 원만한 가족 생활: 진정한 부모공경과 올바른 자녀 사랑

그리스도는 원만한 가족 생활 가운데 임재하신다. 원만한 가족생활은 하나된 순결한 부부관계 에 기반하여 진정한 부모공경과 올바른 자녀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부모 공경 가운데 그리스도는 임재하신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법도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으로서 이를 행함으로써 우리가 잘 되고 장수하는 길이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그리고 부모는 자녀사랑은 올바르게 표현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된다. 자제를 잃은 험한 말과 표정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이들을 낙심시킨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자녀에 대한 바른 교육의 길은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말씀에 따라 하는 것이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유순한 말과 애정어린 타이름과 설득으로 자녀들을 인도해야 한다. 자녀를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인격체로서 위탁받은 선물로서 대해야 한다. 이러한 사려있는 자녀 양육 가운데 그리스도는 임재하시어 자녀들의 인도자가 되신다. 그분이 우리자녀들의 양육자가 되어 주신다.

3. 원만한 사회생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열심히 일하는 직장, 사회적 친교, 자연과의 청지기다운 교통 가운데 같이 하신다.

1) 열심히 일하는 직장

주님은 우리 성도들의 원만한 사회생활과 직장생활 가운데 우리와 같이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도 비용을 내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라고 가르친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8).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다.”(살후 3:10).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게을러 일을 만드는 자가 있는데 이들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1-12).

그리고 직장에서 고용되어 일하는 자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상관을 도우며 그 지시를 받으라고 가르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그리고 눈가림만으로 외식하지 말고 진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듯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라고 권면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6-7).

그리고 감독자들은 일하는 자들을 위협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저들을 대해주라고 가르친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사회적 신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는 동등한 형제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적 법과 질서에 종속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8). 주님은 우리 각자가 사회적으로 가진 지위와 재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자의 재능을 최선을 다하여 발휘하여 선한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신다.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경영인은 경영인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공직자는 공직에 봉사하는 자로서 각자의 임무를 성실하게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세상질서의 모습이다.

2) 사회적 친교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원만한 사회적 친교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과 가정만을 위한 기도와 감사만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기도와 중보기도와 감사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딤전 2:1). 그리고 대통령과 높은 공직을 맡은 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안정되어야만 우리의 삶이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2). 오늘날 아랍권 나라들을 보라.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국가들은 민주화 혁명이 일어난 후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폭탄 테러와 데모와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전 국민들은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자기의 상관에게 눈가림만 하고 순간을 모면하는 외식의 근무태도를 버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근무해야 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근무를 함에 있어서 생계만을 위하여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태도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깨어 있어 열심히 일하는 개인과 사회는 번영하고, 비전이 없고 게으른 개인과 사회는 퇴보한다. 법과 도덕과 윤리를 준수하는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이루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각자 편한대로 행하는 사회는 무질서와 불행한 사회를 이룬다.

3) 자연과의 청지기다운 교통

주님은 우리들의 자연과의 바른 교통 속에 임재하신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나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존해야 할 우리 삶의 터전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연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자연은 청지기인 인간의 삶의 방식에 종속되어 있다. 에덴에서 우리 조상은 지식의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청지기인 인간이 저주를 받음으로써 자연도 원치 않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수고함으로 땅의 소출을 먹으며, 땅은 각종 재해를 인간에게 가져다 주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 자연의 청기기인 인간이 하나님과 소외됨으로써 자연도 본래의 창조의 질서에서 소외되어 허무에 종속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자연의 구속을 증언하고 있다. 자연도 인간의 원죄 때문에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으나 다가오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구속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메시아의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 자연도 그 종말론적 구속의 날에 썩음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자연은 함께 탄식하면서 기다리며 고통 속에서 종말론적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1-22). 중세의 성자 프란시스(St. Francis)는 이러한 자연을 형제라고 하였다. 구원받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 있는 신자들은 자연과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한다. 그 가운데 자연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구주로서 다가오신다.

4. 복음의 전도

신자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도 이방인에게 전도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순종의 제물로 드리는 이방인 제사장들이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신자들은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모든 신자 제사장(all believers priesthood) 교리를 천명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인내와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도 가정과 직장과 사회적 모임에서 복음 전파에 무시로 힘을 써야 한다. 이 가운데 주님은 임재하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복음의 전파 시에 주님이 항상 자기 곁에 같이 계셔서 힘을 주시어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되고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간증한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7).

복음 전도는 입으로 증거하는 것보다 삶의 증거가 더 효과가 있다. 입술의 증거가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먼저 우리의 이웃들에게 성결한 삶으로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윤리와 삶의 실천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미 무언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왜 기독교가 불신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전도가 어렵게 되었는가? 그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여러 가지 잘못된 관행이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전도의 문을 막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면서 오늘도 살아계시는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