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지구촌교회 김인환 담임목사ⓒ광교지구촌교회

본문: 사도행전 5 : 17~32

 
작년 창립기념축제 때의 일입니다. 축제의 기쁨을 더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좋은 선물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지갑, 핸드백, 가방, 심지어 갤럭시 탭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저도 담임목사로서 무엇을 내놓을까 하다가 제가 지은 책 몇 권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갤럭시 탭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에 집중되었습니다. 사회자가 제 책을 들고 행운권 추첨을 하는데 다들 당첨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년간에 걸쳐 쓴 책이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는 절대 책을 내놓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서 교사 세미나를 하는데 그 교회에서는 교역자가 오늘 추첨을 통해 저자의 사인이 들어간 책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니까 선생님들이 다들 당첨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날 책을 구입한 다른 모든 분들의 책에 자상한 멘트와 함께 사인을 해주고 돌아왔습니다. 똑같은 책인데 대상에 따라 환영을 받기도 하고 환영을 받지 못하기도 한 것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제 책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초대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이 본문에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무리들에게 성령의 임하셨고 그들은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들이 모여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병든 자들이 치유되며,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듣고도 거부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에 치명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거부되고 있는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세상은 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감정적으로 복음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7-18절 보시죠.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시기가 가득 일어났습니다. 언제요? 바로 그때입니다. 이 본문 17절에는 한글 성경에 생략되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then’이라는 단어, 즉 ‘그때’라고 번역되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그때’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도들 앞에서 거짓이 들통 나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있었던 때입니다. 또한 이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 때이자 예루살렘 주변과 지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때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의 마음에는 시기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생겨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시기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왜 시기할 일이 아닌데 왜 시기를 한 것일까요? 기독교를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아니 복음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한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 복음을 듣고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차분히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평소 갖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기독교를 거부합니다. 마음에 부정적 감정이라는 바리게이트를 세우고 기독교가 자신에게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냥 기독교와 기독교인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영화 벤허의 원작자 루 웰레스처럼 성경을 반박하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면 루 웰레스처럼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냥 감정적으로 기독교를 대하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지적이지 않아서 믿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몇 해 전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한 분이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지성적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증언할 수 있지만 굳이 더 증언하지 않아도 수많은 지성인들이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증언은 충분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지성적이지 않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제비만은 사람을 믿고 날 잡아먹으라는 듯 사람들이 사는 집에 집을 지을까요?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천적들이 덤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의문을 품는 자는 도망가고, 믿는 자는 인간의 보호를 받는 것인데, 과학은 이런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믿고 안심하고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 제일 가까운 안채에 떡하니 집을 짓는 것이지요. 사람을 믿고 와서 둥지를 트는데 어떻게 잡아먹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유명한 말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가 지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감정적으로 기독교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혹시 이중에 기독교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해 왔던 분이 계시다면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세상은 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비합리적인 생각에 메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합리적입니다.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가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며칠 전에 KBS 시사기획 프로그램인 “창”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자동차 급발진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급발진 차량에 장착되었던 부품을 정상차량 부품과 교체하니 바로 급발진이 재현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급발진으로 인한 사고차량이 단순사고로 수리되어 재판매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국내 최대의 자동차 회사들이 급발진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2008년부터 에어백이 장착된 차량에 EDR, 비행기로 치면 블랙박스를 몰래 설치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설치한 회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EDR자료를 분석하면 급발진인지 아닌지를 규명할 수 있는데도 국토해양부합동수사대는 급발진사고로 추정되는 온갖 의혹투성이의 사건을 덮어 두려는데 급급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지금까지 비합리적입니다. 합리적으로 세상이 돌아간 적은 없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합리적이지 않아 복음을 거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비합리적인 사람들이기에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복음을 가장 잘 압축한 구절을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생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이들을 옥에 가두고 핍박한다? 이게 합리적인 사람들의 행동입니까? 그들이 만약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자신들이 가두고 철저하게 감시한 사도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 풀려나 다시 복음을 전하다는 소식을 부하들로부터 들었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비춰질까를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 자신들의 죄를 고하고 돌이켰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복음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세상은 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작은 이익 앞에서 비합리적이 됩니다. 저는 시사기획 “창”을 보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누가 봐도 급발진이라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들 말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대응한 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예수가 구주이시고 주님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한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핍박 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변화된 갈릴리 촌사람, 예수의 제자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해 버립니다. 군중들이 그들을 따릅니다. 무슨 말이에요?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인 틀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그들의 위치가 흔들린 것에요. 그것도 배운 것도 없는 갈릴리 촌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그들을 옥에 가둔 것입니다. 다시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본문 22-23절 보세요.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사실 복음을 거부한 대제사장과 함께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념을 깨뜨리는 보고를 했습니다. 옥문을 든든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으되 사도들이 그곳을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영적인 세계가 있구나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처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천사의 존재도 부활하신 예수님도 복음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갇힌 사도들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다시 잡아왔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에 대해 고린도전서 1장 22-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나님보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복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들과 우리가 그 증인입니다.

앞서 소개한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서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서언을 쓰고 있습니다.

“요즈음 나는 70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꼭 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은 한 가지이지만 묻는 사람들의 말투는 제각각 다릅니다.
 
예수님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이 하는 안티 크리스천들은 경멸조로 묻고, 카뮈의 경우처럼 신 없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배신자를 대하듯 질책하는 투로 말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금시 혀라도 찰 듯이 혹은 한숨을 쉴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 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에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가지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 이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도 거북한 무엇이 암종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가 봅니다. 겉으로는 강한 싸움꾼인척 하지만, 옆에서 누군가 한마디 훈수를 하고 조금만 역성을 들어주면 금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약한 무신론자들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성경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쟁이 맞습니까? 아니면 무신론자와 다름없는 선데이 크리스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