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3년 8월 18일
본문: 갈라디아서 3:5~14
설교: 이수영 목사
제목: 교회, 아브라함의 자손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입니다. 단지 혈육상으로만 보면 아브라함의 선조들이 또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하나님께서 노아 때 대홍수로 노아의 가족만 남기고 온 인류를 지면에서 한 번 멸하셨고(창세기 7-9장), 그 후 바벨 탑 사건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신(창11:8-9) 뒤에 언약의 백성으로 처음 택하신 이가 아브라함이었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징으로서 명하신 할례를 처음 받은 이도 그였기에(창17:10-14, 23-24)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12: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창12: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큼 칭찬들을 만한 그의 성품이나 행적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주권적 은혜로 아무 자격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음을 아는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그에 의해 번영하는 백성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는 아무런 자격조건 없이 택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아브라함이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명령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그동안 잘 살고 있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백성을 말합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단지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복이 될지라.” 하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만 복을 누리지 않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백성인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는 복을 함께 누릴 백성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확대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라, 민족, 언어 구별 없이 모든 시대, 모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불러 모으시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누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진정한 상속자인가?” 하는 질문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제기되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주장하기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15:6의 말씀을 따라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진정한 상속자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여기심을 얻을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을 받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내린 결론인 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그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롬4:11-12)

율법을 준행하며 할례를 받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결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독점적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본문 10-13절을 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27:26)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18:5)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21:23) 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오히려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지켜 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한 율법의 말씀을(신27:26) 상기시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오히려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둘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한 죄와 그로 말미암는 저주에서 우리를 살려내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영광이며 복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때 우리에게는 그의 복만 물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유산이 또한 우리에게 물려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고 떠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쓰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8)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 땅이 어떻게 된 땅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와 절대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복 주심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것이 아브라함이 나이 백 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창22: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명령에 반발하거나 철회를 간청하거나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철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즉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신 말씀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속으로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있고 그를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이 아이를 죽여 제물로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다시 살려내실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히11:17-19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창21:12)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가슴에 품으며 그대로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그런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또한 다른 이들과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해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되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우리도 받아 누리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복 받게 하고 세상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복 받게 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전도하는 것입니다. 선교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온 세상으로부터 구원에로 택하셔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을 일컬어서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하신 주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명공동체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참되고 복된 삶을 증언해야 할 거울이 되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