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역사적 예수는 단지 지난날의 예수가 아니다. 그러한 예수는 박물관에서 그 유품이나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한 예수는 과거의 인물로서 우리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오늘날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시는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며, 우리 가운데 계신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며, 그분과 사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간 역사적 예수는 지난날의 추억의 대상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는 현재적 그리스도가 된다.

1.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사도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지상적 사역에서 이미 자신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실 때를 예견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은 떠나가나 보혜사, 즉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며, 성령은 제자들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그들에 내주(內住)하시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지상적 예수는 지금은 제자들에게 구속의 진리에 관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제자들이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2. 오순절 성령의 오심 사건

부활하신 후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며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신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예수는 제자들이 그가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성령 세례는 구원의 세례(baptism of salvation)라기 보다는 능력 세례(baptism of power)다.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한 권능을 받는 세례가 필요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복음 증거를 위한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지는 능력 세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3.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셔서 지상적 예수의 구속 사역을 가시적으로 증언하신 사역의 보고서이다. 그러므로 저자 누가는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2).

누가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예루살렘에 위치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강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마가의 다락방에 일어난 성령의 임재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사건을 제자들에게 증언하시고 적용시키는 성령의 오심이요, 예수의 지상적 사역에서 미리 예언하신 것이 성취됨을 알려주는 사건이며, 예수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증언하는 사건이다.

오순절 날 성령 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한 예루살렘의 공회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고 난 후 자기들의 신자 공동체에 돌아와서 그 일을 보고하고 합심하여 기도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에디오피아 내시(內侍)에게 다가간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 8:26). 그는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이사야의 글을 읽는 중이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國庫)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행 8:27-28). 성령은 빌립에게 그에게 다가갈 것을 명한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29). 빌립이 그에게 접근하니 내시(內侍)는 이사야의 글을 읽는 중이었는데 “그 내용을 아느냐”고 물으니 “설명해주는 자가 없으니 알 수 없다”며 내시는 빌립에게 병거에 올라 앉기를 청한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 8:30-31). 빌립은 내시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가 믿으니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다른 곳으로 갔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 8:35-38).

가이사랴에 사는 이탈리아인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도 성령은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성령은 먼저 가이샤라에 있는 고넬료에게 말씀하신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3-5). 동일한 성령은 이튿날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행 10:10-16). 성령은 고넬료 전도를 위하여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은 고넬료를 만나기 전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은 그에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왔으니 영접하고 저들의 청을 들으라”고 명하시어, 베드로는 저들을 영접하고 저들의 청을 듣고 이에 응한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행 10:17-23).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 권속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이들에게 내려오신다. 이를 보고 놀라며 베드로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 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 10:44-48). 성령은 이방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사도 베드로와 연결시키고 고넬료로 하여금 베드로를 초청하도록 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고 물세례까지 받도록 하였다.

제2차 선교여행에 나선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서 소아시아 북쪽 무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이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고 유럽으로 가라고 인도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6-10). 이와 같이 초대교회의 선교 지역 선정(選定)에는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안디옥을 거쳐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지 않고 유럽(로마 제국)으로 전파되어 유럽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은 것을,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교회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시에 이러한 성령의 지속적 사역이 그의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선포하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그러므로 영국의 청교도 개혁신학자 로이드 존스(D. Martin Lloyd Jones)는 카이퍼, 바빙크, 워필드를 비롯한 정통개혁신학자들이 오늘날 성령의 직접적 역사와 은사 중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이는 성경 메시지와 교회의 신앙 체험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직접 개입하시고, 성경 말씀 안에서 우리들에게 직접 개입하신다고 천명하였다(D. M. Llyod-Jones, “The Living God”(Sermon): The Evangelical Magazine of Wales 20(2), 16-22, April, 1981). 로이드 존스는 정통 개혁주의 목회자요 20세기의 최대의 설교가로서 이들 정통 신학자들의 정통교리를 수용하나, 은사중지론에 관하여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은사중지론은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등 성경의 가르침에 상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회적으로도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활력과 부흥을 가로막고 신자들로 하여금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교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4. 신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내셔서 오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신자들을 구속의 진리를 알도록 인도하신다. 그 이유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영으로서 인류 구속에 대한 성부의 영원하신 작정과 성자에 의한 인류 구속의 실행에 대하여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5. 죄와 의와 심판,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

역사적 예수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들의 가치관을 노정시키시고 혁명을 일으키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은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이 세상의 관습을 판결하신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9-11). 죄란 인간의 가치평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평가에 준(準)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신, 자유로운 성(free sex) 등의 행위가 인간 가치평가에 따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를 금지하신다. 세상의 의란 인간들 사이의 공감대에서 나오는 것이나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에서 보신다. 전통적 관습, 선행과 인간의 종교적 노력 등이 인간 사회에서는 그럴 듯하나 하나님의 평가에서는 전혀 하나님의 공의에 미치지 못한다. 세상적 판결,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뒤엎으신다. 그것이 인간의 공명심과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 양자의 영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양자의 영으로 오신다. 성령은 바로 승천하신 성자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시는 성자의 영이다. 이 성령은 성부의 영이며, 성자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증언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4-16).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바로 아들 즉 예수의 영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Abba)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비록 방언을 하지 않고 아무런 가시적인 은사의 표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내적인 확신이야말로 어떠한 외부적인 표징보다 더 확실한 표적이다.
 
7.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

오늘도 예수는 성령으로 우리 속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내 안에서 간구하시는 양자의 영은 바로 예수의 영이다. 예수는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계신다. 바울은 이를 증언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오늘날 신자들은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분이 우리가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을 시에는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 얼마나 위대한 내주요 동행하심인가? 예수는 오늘도 그가 보내신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것이다.

8. 신자를 끝까지 어려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도 지키시는 그리스도

오늘도 예수는 우리를 모든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도우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러므로 어떠한 세상의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0). 냉혹한 박해나 사망까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 일제 하 신사참배의 강요를 받은 한국교회 신앙의 선조들의 한결같은 신앙의 태도, 죽음을 무릅쓰는 순교적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주기철 목사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내용인즉,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디라스 오오미까미를 섬기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는 일종의 국민의례이니,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순교를 각오하는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리요. 나는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1944년도에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다. 당시 만 47세이셨다. 그분의 순교 정신 위에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는 예수의 영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오늘날 박해 받는 북한 신자들 가운데 같이 계신다.

9. 말씀의 선포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세계선교의 지상명령을 내리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 천당!”을 외친 위대한 전도자 최권능 목사(1869-1944)는 본명이 최봉석이었다. 최봉석은 평양감사 아래 감찰의 직을 맡았는데 그 직을 이용하여 국고금을 횡령했다는 죄로 투옥되었다가 1900년에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다. 삭주교회 설립자인 백유계라는 유지(有志)가 최봉석이 33세 되던 1902년 어느날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참다운 생활을 해보라”며 복음서를 주고 갔다. 최봉석은 복음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고 삭주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34세 되던 1903년 어느날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을 꾼 후, 그때부터 불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전도는 간단했다. “예수 천당”이라고 소리지르고 난 뒤 “예수 믿고 천당가라”고 전했다. 그는 1905년 삭주교회 집사가 되었고, 교회는 그의 전도 열정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그리고 그는 압록강 지역과 만주 지역을 다니며 “예수 천당”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였고 여러 교회를 세웠다. 최봉석의 회심과 전도 사역에서 우리는 오늘도 선포의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고 죄인을 회개시키는 그리스도의 임재사역의 구체적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10.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셔서 메시아적 통치를 하시는 예수는 오늘도 한편으로는 우주적 통치권으로 역사와 우주를 통치하시나 다른편으로는 그의 교회를 통해서 구속사를 집행하신다.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중국의 일어남과 일본의 침체, 그리고 북한 세습정권의 패망과 한국 민주정권의 융성, 한반도의 통일은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권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는 그의 교회를 통해서 그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2).

예수는 오늘도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 마음 속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의 인격이 그를 원할 때만 그 분이 들어오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오늘도 복음은 전 세계적으로 선포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만 예수와 교통하는 특권이 부여된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성경적 선교에서 이탈하고 있다. 1960년대 화란의 선교신학자 호컨다익(J. C. Hoekendijk)은 「흩어지는 교회」에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것은 전통적 교회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세상을 통해서 그의 우주적 영을 통하여 직접 선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에 의하면 선교란 반드시 교회의 말씀 전파나 선교사 파송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민권운동이나 사회정치적 해방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선교”는 교회가 전파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 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있는 곳에 항상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사역이 이루어진다는 보편구원론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는 개종 유예(proselytism moratorium)를 선언하고 종교 다원주의를 묵시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WCC 운동은 한국대회를 기점으로 그 방향을 새롭게 잡아야 한다. 오는 2013년 10월 31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되는 WCC 부산 총회는, WCC가 오늘날 문제시되는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와 세속주의와의 명료히 결별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의하여서는 누구도 세상을 통해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자는 없다. 세상의 프로그램으로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선교에 의하여만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을 수 있다. 성경에 입각한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으로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교”(missio Christi)를 행하신다. 그는 말씀과 회개를 주축으로 하는 교회의 선교를 행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주적 그리스도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보편적 우주의 영 아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그의 피로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증거하신다.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그의 영을 보내어 주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그의 성령은 믿는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고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역사하신다.

맺음말

성령의 음성은 말씀을 통한 선포와 조명과 함께하신다. 성령은 기록된 성경 계시와 다른 말씀을 가져다 주는 영이 아니라 기록된 계시 말씀을 확증해 주시고, 그 말씀의 범위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그 분의 뜻을 알려 주신다. 성령은 신자 가운데 내주하시며 성도들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 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처럼 모세를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나 이들은 마음을 완고히 하여 성령의 음성을 경청하지 아니하였다고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도 경고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오늘날 그의 영으로 우리와 같이하시는 예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강압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을 그에게 열 때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그분을 향하여 진심으로 열게 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그분이 메시아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앞으로 오시는 주(the coming Lord)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