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장소는 아마 ‘가데스 바네아’일 것이다. 이곳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38년을 더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신 2: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지 13개월여 지나 가나안 접경 지역인 친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모세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모두 12명을 선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다(신 1:22-24).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명은 가나안에서 가져온 과일들을 보이며 그 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고 보고한다(민 13:23-27).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경은 가나안 땅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출 3:8, 17, 출 13:5 etc.).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한 마디로 살기 좋은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민 14:7).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던 12 정탐꾼 중 10명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한 것이다. 이유인즉,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자신들보다 강하기 때문이다(민 13:28, 31).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가나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모두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었다(민 13:32).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던 거주민들 가운데는 아낙 자손들처럼 신장이 장대한 자들(민 13:33, 신 9:1)도 있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백성들 모두가 신장이 장대한 자라고 한 것은, 아낙 자손들로 인해 겁을 먹은 정탐꾼들의 과장된 보고였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자들 중에서 여분네(Jephunneh)의 아들 갈렙(Caleb)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말한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눈(Nun)의 아들 여호수아(Jehoshua)도 갈렙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더욱이 자신들은 아낙 자손들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았다고 보고했다(민 13:33). 백성들은 마치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로 한 듯, 긍정적인 보고를 한 갈렙이나 여호수아보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말을 더 믿었다.

이에 백성들은 크게 낙심하여 소리를 지르며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들은 모세(Moses)와 아론(Aaron)을 원망하며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망은 하나님께로 이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맞아 죽게 하시는가?” 하는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시고(민 14:27), 그들에게 '사십년 동안의 광야 생활'(민 32:13)이라는 형벌을 내리셨다.

40년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수인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친 것이다(민 14:34).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38년을 더 광야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민 14:24, 38)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가데스 바네아. 그곳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장소일 것이다. 한국에 있는 모 여행사가 이러한 성경적인 배경을 가진 가데스 바네아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광고를 하며 모객을 한 적이 있었다.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뜻밖이어서 전화를 걸어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는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리 광고라 해도 너무 한다’고 하면서 가데스 바네아에 가는 것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가데스 바네아는 때때로 가세스(민 13:26) 또는 게데스(수 15:23)로 언급되는 성읍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곳이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이곳에서 죽었고(민 20:1), 모세가 화에 못 이겨 불손한 태도로 물이 나오도록 바위를 내리친 곳이 바로 이곳이다(민 20:11). 또한 열두 정탐꾼이 약속의 땅에 정탐 갔다가 되돌아온 곳이기도 하다(민13:26).

가데스란 이름은 ‘거룩’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테시’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바네아의 어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1905년 이후 시나이 반도 북쪽의 와디 엘-아인에 있는 지금의 아인 엘-쿠데이랏이, 성경의 가데스 바네아라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철기시대의 여러 요새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타원형 구조물은 주전 10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요새가 파괴된 후 여러 해 동안 버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요새는 주전 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주전 7세기, 즉 므낫세 왕 때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요새에서는 히브리어로 새겨진 두 개의 오스트라콘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 지역을 상당 기간 실제적으로 지배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번째의 요새는 주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요새는 요시야왕 때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아인 엘-쿠데이랏에서는 청동기 시대 후반 또는 철기시대 1기 유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민수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그곳에 머물렀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들에게는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이것을 문제 삼아 출애굽과 그 이후 잇따른 가나안 정복 사건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를 다르게 해석하여, 가데스 바네아를 아인 엘-쿠데이랏으로 보지 않고 아인 케데이스와 아인 케세이메라는 다른 장소를 가데스 바네아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언급된 가데스 바네아는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기 보다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민 33:36), 성경에서는 그곳이 특별히 의미있는 거류지였다고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 이곳과 그 밖의 지역에서 이루어질 발굴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소와 관련된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풀어 줄 것이다.

또 이곳은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기에 갈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국경 쪽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곳을 보려면 이스라엘에 있는 호로샤 전망대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내산으로 추정되는 제벨 할랄과 가데스 바네아의 평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낙원을 예비해 놓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종살이하던 그들을 위해 앞장서 싸우셔서 이집트에서 건져내고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다. 마치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와 같이 안아주시는 분이고, 항상 어느 곳에 있든지 동행하시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면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인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의 자녀 삼으신 분이시며, 많은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이끌어주시고 또 많은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있게 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께서 본인들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많은 사례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도 있었다. 자기들의 눈으로 본 것 이외에는 믿지 못하고, 자기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과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마음에 그런 두려움과 불안함이 꽉  들어차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이 든다면 다시 홍해를 따라 돌아서 광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지식과 안목에 의지하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믿음이 들어설 때까지 광야를 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내 앞길의 문제들을 내가 해결해 보려고 하면, 우리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절대로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 교만이 무너질 때까지 돌아야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할 수 있으셨을 텐데, 바로 들여보내시지 않으셨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믿음과 순종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교만을 버리는 훈련이다. ‘교만은 곧 패망의 앞잡이’이기 때문이다. 교만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망할 것을…. 그래서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 자기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고, 또 이 문제를 자기가 놓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꽉 잡고 놓지 못하는 교만. 이런 것들을 훈련으로 제거할 수 있는 학교가 바로 광야 학교이다. 광야는 믿음의 훈련장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헌신한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가데스 바네아이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