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제6조 교회와 전도

WCC가 제시한 새로운 선교관에 응답하고 있는 조항이다. WCC는 다음과 같이 복음주의와는 상이하게 설명한다: 전통적 교회의 입력구조(come-structure)는 교회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선교 구조, 정적 사고방식, 세상으로부터의 고립, 현실 밖에 존재함으로 복음선교에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였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방해하는 이교적 구조라고 한다. 그리고 개종에만 몰두하는 전도는 선교와 정반대가 된다며 그 자신을 구원의 중개소로 취급하는 것이라 비판하고, WCC에서 세상이 선교에 방해가 되었다는 전통적 구조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WCC의 새 선교인 출력구조(go-structure)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역동적인 구조이며 모든 확장 개념을 버리는 뜻이라 설명한다. 교회의 새로운 선교형태란 세상 사람의 요구에 봉사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고 방문해야 할 일, 젊은이들과 노인들을 돕는 일, 성례전적 생활을 조성하여 소집단 속의 인간들이 자신을 개발하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일, 고독을 극복 할 일, 직업적 그룹들의 성장, 노동자 회중과 학생들의 모임, 사회봉사운동, 정치적 활동을 위한 유연성과 다양성 요청, 급변하는 사회에 올바르게 대처,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라고 한다.

WCC의 ‘세계를 위한 교회’를 보면, 과거의 선교도식은 하나님-교회-세상이었으나 이 도식은 성서의 증언을 왜곡시킬 경향이 있다며 ‘하나님-세상-교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몇 개의 성구들, 즉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하셨고(고후 5:19), 하나님의 관심은 전 우주, 모든 피조물(요 3:16)이며, 하나님의 제1차적 관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하였다.

WCC가 교회를 세상에 대한 ‘나그네’라 하고 교회를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는 데 반해, 로잔언약은 교회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고 설명하며, 교회는 ‘기관’이라기보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Gemeinde)’라는 의미라면서 ‘교회’ 개념이 오해되지 않도록 설명하고 있다. 독일어는 ‘교회’의 두 가지 의미를 잘 설명한다. 교회의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소명에 근거한 것이지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며, 로잔언약은 전도가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며 최우선적인 일이므로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할 것을 천명한다. 로잔언약 5조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바에 이어, 6조는 교회는 사회적 책임에 앞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전도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함을 고백하고 있다.

제7조 전도를 위한 협력

로잔언약은 ‘일원론적 역사관’으로 WCC에서는 있을 수 없는 테마인 ‘전도를 위한 협력’에 관해 선언한다. WCC의 관심이 교회 대신 '세계', 그리스도인 대신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이미 잘 파악돼 있다. WCC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이고,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나님이라는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불신자를 포함한 전세계라고 한다.

이미 1967년 WCC의 ‘세계를 위한 교회’ 보고서는 일원론적 역사관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 신학이 이중적 역사관을 지녔고, 교회 역사와 세속 역사, 그리고 구속사와 일반 역사를 구별해 왔다고 비판한다. 새로운 신학적 스타일인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는 독자적인 역사를 가질 수 없고, 역사는 특별한 역사가 아니라 ‘온 인류의 전체적인 역사’라고 한다. 이처럼 WCC에는 오직 하나의 역사밖에 없다.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샬롬(Shalom)의 역사이며, 이 샬롬의 나라를 바로 하나님 나라로 이해한다. 호켄다이크는 이 샬롬은 인간의 내적 본질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건이자 인간관계의 사건이고, 샬롬은 상황 속에서 발견되고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천국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는 이유로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현재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에 심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WCC는 회개를 통한 개인구원과 불신자의 멸망, 미래적 천국관을 상실하고, 대신 역사 내적인 천국을 의미하는 총체적 개념의 ‘전(whole) 세계’, ‘새로운 질서’, ‘하나의 역사’라는 단어들로 대체했다.

로잔언약도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도록 부르심에 관해서 선포하고, 우리의 불일치가 화해의 복음을 손상시킴을 우려한다. 또 조직적인 일치의 다양성에 관해 언급하며, 전도를 위한 것이 아닌 조직과 동일한 성서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과의 교제와 사역, 전도를 위해 일치단결해야할 불가피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일치의 추구는 진리와 예배, 거룩과 선교에 있음을 명시한다. 바로 이 진리와 예배와 거룩,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선교의 특성 등은 WCC의 일치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네 가지와 무관한 일치운동은 아무리 포괄적이고 성공적이라도 진정한 기독교, 기독교 선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제8조 교회의 선교 협동

WCC는 20세기 후반부터 가시적인 연합이나 협력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지만,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협력은 결코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WCC는 이미 1960년대부터 세속적인 샬롬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WCC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M. M. 토마스(Thomas)는 1975년 제5차 나이로비 WCC 총회 때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로 강연하면서, 한편으로 인류연합을 위한 ‘투쟁의 영성(Spiritualtät des Kampfes)’이라는 창의적인 개념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회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화적이건, 사람을 종속시키는 모든 연합을 파괴하고 더 성숙한 연합을 위하여 남여(男女)를 해방하며, 이 연합이 다시금 종속되면 또다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잔언약의 협동에 관한 조항은, 오직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선교만을 위해 피력한 것이다. 로잔운동은 세계복음화가 모든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 전체 책임임을 선언하고, 성서 번역, 신학 교육, 매스미디어, 기독교 문서사업 등의 선교 사업을 위해 교회들간 협동을 주장한 것이다.

선교의 새 시대에 일어나는 선교교회와 피선교교회의 지역변동은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계선교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기독교 세계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세계복음화를 위한 협력에 역행하는 우리 한국교회의 분열상과 그 죄악에 대한 무감각함에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는 소원과 아울러 자기실현의 욕구가 하나로 겹쳐진 한국교회 사역자들의 가장 큰 죄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가면서도 죄의식이 별로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돌이켜 왜곡된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도 함께 세계선교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협력은 확실하게 거부한 것이다(고후 11:4, 갈 1:6-10).

제9조 복음전도의 긴박성

로잔신학은 WCC의 반선교정책과 반개종주의에 관해 선언한다. WCC는 개종에 몰두하는 것이 반선교적이므로, 이제 교회가 ‘출력 구조(go-structure)’로서 ‘자신을 주는 교회(self-giv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주는 교회’에 대해서는 “교회의 모습 (Statur)과 신분 (Status)을 사멸시키고(absterben lassen) 세상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이라며, 그 성경적 근거로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 말씀의 “종의 형태를 입은 메시야의 삶”을 제시한다. 재물에 부유한 교회는 세상과 동료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전 소유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 교회가 천국복음을 증거하며 회개와 개종을 요청하는 것은 세상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교회가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하나의 ‘기능’에 그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와 같이 WCC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큰 소명으로 아는 전도와 선교의 개념을 다 사용하지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세상에 선포한 적은 없다. WCC의 선교는 실제로 위에서 간파되듯 세계 복음화도, 세계 선교도 아니다. WCC는 잃은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복음전도의 긴박성’ 같은 테마 역시 WCC와 거리가 멀다. WCC 선교신학 즉  ‘Missio Dei 신학’은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복음적인 신앙을 떠난, 정치·사회적인 샬롬 운동이며 해방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조항에서 로잔언약은 인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7억의 인구가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잃어버린 영혼들의 심각성을 고백하며, 그들을 등한시했던 점을 스스로 견책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하에 WCC에서 반선교정책으로 내어놓은 모라토리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교회의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비복음화지역으로 그 자원을 회전하여 선교사들이 6대주 전역에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여 빠른 시일 내에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멸망하는 27억 사람들이 이 복된 소식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도록 희생적으로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제10조 전도와 문화

로잔언약은 이 조항에서 WCC의 세속화 신학에 답변한다. WCC는 교회가 세속화돼야 할 이유를 성경에 두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세상은 전적으로 세속적이며 세속화는 현대사회의 한 양상이므로, 교회는 세속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신학의 지배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것이다. WCC는 세속화를 ‘복음의 열매’로 이해한다. WCC는 영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은 변하고, 불변하는 상태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교회적·신학적 전통에서 소중하게 간직돼 온 많은 상징과 개념들이 그 타당성을 잃게 될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잔언약 제10조는 세계복음화 전략에 관한 조항이다. 복음을 타문화권에 가져가면 그곳의 과거 전통문화와, 현재 정치·경제·사회 상황과 만나게 된다. 복음이 선교지의 과거 문화와 만날 때는 토착화 신학이 발생하고, 현재 상황과 만날 때는 상황화 신학이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 선교신학에서는 토착과신학이라는 개념이 ‘상황화 신학’에 흡수되어 사용되고 있다. 복음의 상황화를 우리는 복음의 문화화 또는 맥락화로도 칭한다. 이 항목은 복음이 과거문화를 만나 그 문화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관점에서 언급된다. 복음이 선교지 문화 속에 뿌리내릴 때, 새로운 토양에 의해 변질되지 않고 복음의 열매를 맺으면 올바로 토착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새로운 토양에 의해서 변질되면 이단적 신학으로 잘못 토착화가 된 것이다.

제10조는 복음의 바른 토착화를 위한 판단 척도를 제시한다. 그 척도는 우리의 경전인 성경이다. 어떤 문화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지만, 모든 문화는 성경적 복음에 의해 판단받아야 한다. 로잔언약은 어떤 문화는 아름답고 선하지만, 모든 문화는 타락한 인간에 의해 죄로 물들었고 악마적이라고 판단한다.

바로 이 점이 WCC의 세계관과 철저하게 다른 점이다. 로잔언약은 죄와 타락으로 얼룩진 인간과 문화에 대해 언급한다. 교회는 세상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결코 세속화돼서는 안 되며 우상숭배로 악해진 문화와 그대로 야합할 수도 없다고 선언한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 말씀을 잣대로 문화를 변혁시키고 풍요하게 만들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고백한다<계속>.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