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에서 이동하여 시나이 광야로 와서 그 광야에서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이 그 산 맞은편에 진을 쳤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은 약 2개월 만에, 애굽의 라암셋에서 시내 광야까지의 직선 거리 약320km를 행진해 왔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루에 갈 수 있는 길을 80리, 즉 약 32km로 본다. 물론 잘 훈련된 군인들은 이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약 10일이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까지 약 6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는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쇠력이 약해진  노인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또 양과 같은 가축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친 시내 광야는 시내산을 볼 수 있는 광야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만약 모세의 산을 시내산이라고 추정한다면 이곳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내 광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진 곳은 시내산 정상을 볼 수 있는, 시내산의 남동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와디 세바이예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친 곳으로 알려진 에르 하하 평원 지역에서는 시내산을 볼 수 없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산 맞은 편이 아니라 옆에 있다.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지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쳤던 곳은 시내산의 맞은 편에 있는 와디 세비야아라고 베드윈들은 말한다. 그곳에서는 시내산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칠 만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물이 풍부하다. 시내 광야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 2절에서 3차례나 더 언급을 한다.

이처럼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장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곳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곳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멀리서나마 우레와 번개와 구름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곳이며[출 19:16] 더욱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국가적 기반인 율법을 수여한 곳이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소위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막까지 건립됨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개시하는 장소이기에 더욱 중요한 곳이다.

시내산은 성경에서 호렙산이라 불리고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은 산이다. 시내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가 않다. 시내산의 위치 확인은 이집트 탈출 후의 출애굽 여정의 확인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므로 옛부터 성서지리학상의 난제다. 그러나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산으로[출 19장, 출 24:9~18], 호렙산이라 불리던 산으로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시내”라는 말은 바벨론의 달의 신 “sin”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 신앙이 아라비아에 도입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가시나무 무성한 곳, 떨기나무 많은 곳”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나와 홍해를 하나님의 은혜로 육지와 같이 건넌 후, 3개월 되는 때에 시내 광야에 진을 쳤다[출 19:1]. 이곳은 또 다른 성경 기사에서는 ‘가데스 바네야’에서 세일 산을 지나 열 하룻길 되는 곳[신1:2]이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친 광야는 산기슭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기에 충분한 넓이이며, 또한 산정을 쉽게 바라볼 수가 있었다[출 19:16, 18, 20]고 한다. 모세는 바로 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이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산기슭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율법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이 산기슭에서 발령된 것이다.

출애굽의 기록 말고도 시내산은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 선지자가 관련된 산이기도 하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영전 전쟁 후 바알 선지자를 모두 죽임으로써 이세벨 여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세벨을 피하여 시내산으로 도피한다[왕상19:8]. 이곳 시내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을 얻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을 끝까지 수행한다. 시내산의 위치에 대하여는 에돔에 있었다는 기사[신 33:2, 삿 5:5,합 3:3]가 있어서 에돔 땅 세일 산지로 보는 학자도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상황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여 화산이 폭발했을 가능성이 있던 산을 찾아 아라비아 엘 라으즈 산으로 보던 학자도 있으나, 전통적으로는 시내 반도 남쪽에 있는 제벨 무사[모세의 산]를 시내산으로 보고 있다.

4세기에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의 황태후 헬레나가 작은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에, 527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스 1세(527-565)가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 성 캐더린를 기념하여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이 건물이 성 캐더린 수도원이다. 그리고 이 수도원의 뒤쪽에 솟아있는 산이 바로 <제벨 무사>로, 아랍어로 <모세의 산>이라는 뜻이며, 높이 2285m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학자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일 델타의 람세스에서 지중해와 발다빌 호수 경계의 사주를 통과해서 동진했다고 여기고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시내산은 엘리 아리슈 남쪽 카데슈 바네아의 서쪽 약 140km 떨어진 광야에 솟은, 높이 890m의 <제벨.엘하랄>이라고 하는 제단을 닮은 암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967년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의 결과 시나이 반도 전부를 장악하였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줄 때까지 샅샅이 탐사하고 연구하였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출애굽 사건의 고고학적 흔적을 찾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전 3000년대와 2000년대의 주거 흔적은 발견되었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생각하는 출애굽 시기인 주전 15세기 또는 주전 13세기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가데슈 바네아도 발굴 결과 주전 10세기 솔로몬 왕이 건설하였다고 여겨지는 군사적 요새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 민족이어서 천막을 치고 이동하는 습성이 있어, 정착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출애굽 시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곳을 제외한 시나이 반도 남쪽에서 시내산의 위치를 찾기 시작하는 학자들도 있다.

제2의 설은, 카이로에서 아라비아의 메카로 향해 시나이 반도를 정동으로 횡단하여 아카바만 북단에 이르는 통로에 있다고 하는 설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16절 이하의, 화산의 폭발을 생각하게 하는 정경의 묘사에서, 시내산을 아라비아 반도 서쪽에 있는 사화산지대로 여기고 생각한 설이다. 그 주장의 근원은 이러한데, 1978년 미국의 ‘Ron Wayatt’라는 사람이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의 “Gulf of Aqaba”라는 홍해 바다 속에서 전차 수레바퀴 모양의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모세’의 인도 아래 홍해바다를 가로질러 출애굽(Exodus)하는 히브리 사람들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인들이 수장될 때, 함께 잠겨버린 전차 수레바퀴가 오랜 세월 동안 부식되거나 산호가 붙어서 생긴 유물일 거라는 가정 하에, 그 일대에 대한 답사를 시작하여 1984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Tabuk’이라는 도시와 요르단 국경 사이에 있는 ‘Jebel El Lawz’라는 산을 ‘시내산’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심하게 불에 타 녹아내린 검은 화강암 바위가 있는데, 성경의 ‘화염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그 곳이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열로 인해 생겨난 흔적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송아지 모습의 그림들이 여러 개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들 또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다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던 제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시나이반도 중동부 홍해 바닷가에 ‘Nuweiba’라는 조그마한 휴양도시가 하나 있는데, 요르단의 아카바(Aqaba)항으로 가는 대형여객선과 쾌속선이 하루 두 차례씩 운항되는 항구도시인 까닭에, 이집트에서 사우디의 메카와 메디나로 떠나는 성지순례객 가운데 비행기를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요르단을 거쳐 육로로 메카를 찾기 위해 주로 이용하거나, 사우디로 돈벌이하러 떠나는 이집트 근로자들이 배를 탈 경우 주로 이용하는 항구로, 이 ‘Nuweiba’에 가면 솔로몬 왕이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신전 터라고 믿는 장소에 기둥이 하나 남아 있고, 그와 똑 같은 기둥이 홍해 건너편 사우디 땅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이곳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기 시작한 곳이며 반대편에 있는 ‘Jebel El Lawz’라는 산이 ‘시내산’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을 보면 이집트의 바로왕(Pharaoh)이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마지못해 승낙한 뒤 곧바로 군사들을 풀어 뒤쫓았다.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홍해 속에 수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Nuweiba’는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곧장 걸어서 가더라도 여러 날이 걸리는 험한 여정이므로, 곧바로 뒤를 따라온 이집트 군사들이 미치기 전에 200여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닐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가기 전에 숙영한 곳은 믹돌과 큰 바다 사이에 있는 비하이롯 건너편 바알 스본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믹돌은 히브리어로 요새를 뜻하는 것으로 이곳 누웨바가 가나안쪽에서 이집트로 들어가는 길목이 아니므로 요새를 건설하여 지키는 중요 거점이 아니다.

그러나 시내산에 대한 가설이 여러 가지 있지만 혹 내가 수긍이 가지 않더라도, ‘Ron Wayatt’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찍어 온 사진과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한 내용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고민해 볼 가치가 있겠다 싶어 이렇게 소개를 한다.

또 다른 가설로는 암각화의 보고인 이스라엘의 카르콤산을 시내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구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주거 흔적과 바위에 새겨진 수백 점의 암각화 그리고 제의용 동 기둥만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카르콤산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네게브 사막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다만 카르콤산은 제의 흔적들이 집중되어 있어서 시내산의 추정지로서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일부 아마추어 여행가가, 시내산이 확정적으로 알라으즈산인 것처럼 일부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 문제는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검증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정확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는 전통적으로 인정된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모세의 산을 시내산으로 인정하여 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신명기 33장 2절, 사사기 4-5장에서 시내산이 에돔 가까운 세일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솟게 한 므리바가 민수기에서는 카데슈로 돼 있는 것으로 해서, 시내산의 위치를 카데슈 바네아 부근의 산으로 보는 설도 있어 시내산의 바른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인의 주관심은 시내산의 정확한 위치보다도 하나님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서 계약을 맺었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내산이 호렙산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