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나는 대학생 시절 서울대학교 근처인 종로5가 충신동에서 살았는데 기독교 방송국에서 매일 저녁 방송하던 “명곡을 찾아서”라는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즐겨 듣곤 했다. 매달 초 기독교 방송국을 찾아가서 한 달 동안 방송할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얻어다가, 방송할 고전음악에 대한 내용을 “명곡 해설집”을 사다 놓고 미리 읽으면서 알아 두었다가, 그 음악을 들으면서 즐기곤 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고전음악을 즐겨 듣곤 했다. 결국 나는 고전음악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거의 대부분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고전음악을 듣는 것은 공부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전음악은 우리들의 심성을 편안하고 즐겁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드는 귀중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세계인의 언어이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여 묶는, 참으로 귀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Hour of Decision”(결단의 시간)
나는 대학생 시절 기독교 방송국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방송하던 “Hour of Decision”(결단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듣곤 했다. 즉 빌리 그레함 박사님의 전도 설교를 즐겨 들으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다. 결국 나는 빌리 그레함 박사님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복음 설교와 전도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고 동시에 영어 듣기도 익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영어 회화를 특별하게 배우지는 않았지만, 대학을 졸업한 다음 미국에 유학 가서 교수님들의 영어 강의를 듣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페이스 신학교의 학장이며 교회사 교수였던 매크레이 박사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도 빌리 그레함 박사님의 설교를 늘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방송을 통해 영어 설교를 자주 듣는 것은 영적으로는 물론 영어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오랜 후에 나는 빌리 그레함 박사, 루이스 팔라우 박사, 존 스토트 박사, 안 그레함 롯츠 여사, 제임스 팩커 박사, 피터 쿠즈믹 박사,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 등의 설교를 여러 집회에서 직접 들으면서 가슴에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다.

셋째, “백운대 등산”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리고 대학생 시절에 이곳저곳 산을 오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산을 오르면서 좌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좌우에 우뚝 우뚝 서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사방에 펼쳐 있는 경관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나는 백운대를 자주 오르곤 했는데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 있는 경관을 바라볼 때,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한 시원함과 기쁨을 만끽했다. 나는 눈 오는 겨울에도 백운대를 오르곤 했는데, 내려올 때는 일부러 눈 덮인 산길을 미끄러져 뒹굴면서 내려오면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연과 친밀한 교감을 느끼며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정서를 함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 “산들과 모든 작은 산들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시 148:9-13).

넷째, “서양사 전공”
11살 때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홀로 넘어서 남한에 올 때부터, 나의 삶의 목적은 공부보다는 주일을 잘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해서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는 비교적 잘 했지만, 공부는 둘째였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이 첫째였다. 나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경직 목사님이 “좋은 목사가 되려면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셔서 서울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해서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서양사와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역사적 안목’을 습득하게 되었고 지니게 되었다. ‘역사적 안목’이란 ‘독단적인’ ‘일방적인’ ‘민족주의적인’ ‘배타적인’ 사고와 관점이 아닌, ‘균형 잡힌’ ‘양면적인’ ‘보편주의적인’ ‘포용적인’ 사고와 관점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토트 박사님이 지적한 대로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인 통일성’(Dynamic unity holding both extremes)을 지니는 것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균형 잡힌 ‘역사적 안목’을 지니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토마스 하디의 작품에 매료되기도”
나는 서울 문리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면서도 종교학과와 영문학과의 강의도 들었다. 영문학과의 강의를 들으면서 토마스 하디의 작품들인 ‘테스’와 ‘귀향’을 영문으로 읽었는데, 자연 묘사의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기도 했고 주인공이 부딪힌 숙명론적인 비극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자연 묘사의 문장들이 아름다워서 그 문장들을 외우기도 했고, 테스가 당한 숙명론적 비극을 묘사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진술들을 깊이 사색하기도 했다. 그 때 빨간 표지로 된 소설 “테스”를 들고 다니면서 자주 읽었는데, 한두 문장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왜 거미줄같이 가냘프고 아직까지 눈처럼 순결한 이 여성의 살결 위에 거칠고 추한 무늬가 그려지도록 운명지어졌다는 말인가? 왜 그렇게 자주 추한 것들이 순결한 것을, 못된 남성이 여성을, 못된 여성이 남성을 못쓰게 만들었는지를, 수천 년의 분석적인 철학이 우리들의 이성에 맞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지 않았는가?” 토마스 하디의 문학작품들은 문학세계에 대한 나의 안목을 넓혔고 나의 영어 실력도 배양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개척교회를 세우고 목회도”
나의 관심과 삶의 목적은 주일을 잘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해서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중학생 고등학생 때부터 교사의 일과 노방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서울고등학교 3학년 학생 때는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창동교회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설교 때마다 2만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본래 선생님들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듣는 터라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물을 파기 위해 토요일마다 왕십리 벌판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년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장년들도 모였다. 나는 천막을 사다가 치고 주일마다 거기서 예배를 드렸다. 주일아침에는 주일학교를 인도했고 장년예배의 설교를 아침과 저녁에 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해서 교복을 입고 전도와 목회를 한 결과, 40여명의 장년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했고, 80여명의 어린이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2년 동안 개척목회를 한 후 어느 전도사님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나는 본교회로 돌아왔다. 귀국 후 나는 후암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사역했고 영안교회와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했다.

일곱째, “새 생활운동도”
대학생 시절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중요하고, 뜻있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생 시절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과 같은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뜻 깊은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던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때에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진지하게 논의했다. 결론은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한 뒤 소강당에서 그것을 발표했다. 소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밀수입되는 커피와 양담배의 1년 분 금액이 대전시 전체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값과 같다는 조사 내용을 발표하자 학생들이 흥분했다. 서울대 문리대생 수백 명이 방학이 시작된 6월부터 한 달 동안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다방 공원 시장 극장 댄스 홀 요정 국회 등을 찾아 다니며 “새 생활운동”을 폈다. 산더미만큼 수거된 양담배를 광화문 네거리에 쌓아놓고 애국가를 부르며 불태우기도 했다. 사회악과 부조리를 제거하고 사고와 생활을 바꾸자는 우리들의 동기가 순수했고 비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새 생활운동”은 그 당시 수많은 대학교들과 고등학교들에게는 물론, 정치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우리 친구들의 삶에 평생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여덟째, “군 생활을 즐겁게”
지금은 물론 그 때도 일부 사람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싫어하며 피하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평생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싫어하지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어려운 일들을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것을 즐겼다. 대학교 3학년 때 군에 입대하여 1년 6개월 동안 군 생활을 아주 즐겁게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타잔처럼 줄을 붙잡고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는 훈련도 받았다. 무서워하면서 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본래 타잔 영화를 즐기던 터라 줄을 붙잡고 공중으로 멀리 날아가는 훈련이 매우 재미가 있어서 한 번 타고 또 다시 와서 타곤 했다. M1 소총을 쏘는 훈련도 재미가 있었다. 나는 무척 재미가 있어서 한 번 쏘고 또 다시 와서 쏘곤 했다. 포복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머리 위에서 총알이 날아가는데 엎드려서 포복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스릴을 느끼면서 포복훈련을 받았다. 7사단에서 군 생활할 때도 즐겁게 했다. 군대의 규칙을 어기면서 장교의 옷을 빌려 입고 저녁에 마을에 나가서 맛있는 것을 사다가, 여럿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려 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힘들고 즐겁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즐겁다.

아홉째,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나는 고등학생 때는 중구 회현동에 살면서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고, 대학생 때는 종로구 충신동에 살면서 여전히 창동교회에 다녔지만 새벽기도는 거리상 관계로 충무로에 있는 충현교회와 창신동에 있는 창신교회에 다니면서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집 가까이 연동교회가 있었지만 충현교회나 창신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며 기도하는 것이 더 은혜로웠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충현교회나 창신교회로 뛰어 가려면 30여분 걸렸지만, 매일 새벽 30여분 동안 달려가고 달려왔다. 사실 나는 초등학생 때는 평양에서, 중학생 때는 대구에서 살면서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새벽기도는 나의 신앙을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고 회개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젖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벽마다 달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튼튼한 다리를 지니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는데, 외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 새벽에도 집에서 쉬지 않고 새벽기도에 나갔다. 새벽을 깨우는 일은 축복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째, “인생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의 대학생 시절의 추억들”이란 글을 마무리하면서 “인생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인생은 어릴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손으로 빚으시면서 우리들을 쓰실 만한 그릇들로 만들어가신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그 과정에서 실패하는 일도 있고 깨지는 일도 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과정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이 탄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사랑하고 도우면서 한평생을 살아오게 된 것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손과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손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으로 나를 빚어주셨기 때문이고, 어릴 때부터 나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길로 인도해주신 부모님과 신앙의 선배님들의 손길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한평생 동안 나의 인생을 손으로 빚어주시고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인복 목사님, 최병목 목사님, 명선성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