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3일을 여행하고 지쳤을 때 물을 발견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물은 소금기가 워낙 강해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마라이다. 마라는 ‘괴로움’, ‘쓴 맛’이란 의미다. 이곳은 수에즈 동남쪽 약 72km 지점의, 오늘날 하와라[Ain Hawaarch]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곳을 현지 아랍 베드윈들은 아윤무사[Ayun Musa]라고 부르고 있는데, 아랍어로 ‘아윤’은 우물이란 뜻이고, ‘무사’는 모세를 말한다. 즉 ‘모세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곳 모세의 우물은 시내산으로 가는 도로변 좌측에 있는 지역으로, 수십 그루의 대추 야자나무들로 울창한 오아시스다. 그곳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한 나무를 던져 수질을 바꾸었다. 이 나무는 아마 대추야자 나무였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대추야자 나무는 염수를 달게 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 마라의 샘이 있는 이 지역은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반도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시나이 반도이다. 이곳 남부는 험한 산악지대이고 북부는 황량한 광야 뿐이다. 이곳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민족은 오직 베두인족 뿐이다. 겉으로 보면 아무 쓸모 없는 땅으로 보이지만, 이 지역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신학자들은 성서의 땅(Land of Bible)이라고, 지리학자와 기타 학자들은 매혹의 땅(Enchantments)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 통로일 뿐 아니라 지중해 저편에 있는 유럽 대륙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을 통해 동양으로 갈 수 있는 교두보이다.

이런 땅에 주전 1446년경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의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 출애굽에 참여한 숫자는 어른 60만명과 어린이 등 대략 20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의 여로는 광야 즉, 사막이다. 이들은 물을 담기 위해 가죽부대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막 여정에서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가축들과 함께 3일 동안 물 없이 광야를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마라(출 15:23)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서 찾은 물은 ‘쓴물’이어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놨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 수 있소(출 15:24)”. 번민하던 모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출 15:25). 입이 마르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를 물에 던졌다. 그 결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쓴물이 ‘단물’로 변해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한 사건을 놓고 신학자들을 포함, 많은 이들은 기적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엄밀히 기적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적어도 기적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과학적 측면에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열역학 제1법칙, 즉 질량 보존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무에서 유로의 창조(창 1:1)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요 2:1∼11) 등은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가 폭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가신 사건(요 6:16∼21)은 중력의 법칙이 잠시 중단된 현상으로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쓴물이 단물로 변한 것은 화학 반응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비교적 설명이 명쾌하게 할 수 있다. 마라의 쓴물은 물 속에 쓴 맛을 내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음용수로서 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물속의 다양한 성분 중 미네랄(광물질),특히 마그네슘이온과 칼슘이온이 얼마만큼 녹아 있느냐에 따라 센물(경수)과 단물(연수)로 나뉜다. 센물에는 이들이 다량 녹아 있는 반면 단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통상 우물물은 들판이나 광야의 지하수가 흐르다가 지표면으로 노출된 것이기 때문에 센물이라 할 수 있으며, 강물은 단물에 속한다.

또한 물 속의 수소이온농도(pH)에 따라 산성 혹은 중성 또는 알칼리수로 나눌 수도 있다. 중성인 pH7을 기준으로 수소이온농도가 7보다 낮으면 산성, 그보다 높으면 알칼리수로 구분한다. 센물과 강산성수, 그리고 강알칼리수는 음용수로서 부적당하다. 센물과 강알칼리수는 쓴 맛을 내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라의 쓴물은 음용수로 부적당한 센물이면서 강알카리수라는 분석이 나올 수가 있다. 쓴물이 단물로 변하기 위한 조건은 산성 물질에 의한 ‘중화’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내용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산성을 띤 나무가 쓴물을 중화시켰다는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종류의 나무를 물 속에 던져 쓴물을 중화시켰을까. 마라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는 가늘고 가시가 많은 관목인 구르쿠드와 종려나무 등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종려나무는 야자나무의 일종인 대추야자나무를 말한다. 공교롭게도 구르쿠드 나무와 대추야자나무의 열매는 산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구르쿠드 나무의 열매는 극히 소량이어서 마라의 쓴물을 중화시키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마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베두인족들은 자생하는 대추야자나무의 덜 익은 열매로 알코올이나 식초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만큼 대추야자나무가 구르쿠드 나무보다 많다는 것이다.

마라 지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림 지역에도 우물이 12개가 있었고 종려나무가 70그루나 자생하고 있었다(출 15:27)는 것은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는 성경 기록이다. 모세는 이런 화학반응의 매커니즘을 전혀 알지 못했으나, 열매 달린 대추야자나무를 마라의 쓴물에 던져 넣어 단물로 중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모세가 당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치 않고 자신의 학문으로 그것을 분석하면서, 대추야자나무를 던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순례하면서 우리는 성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역사로 홍해를 맨 땅처럼 건넜다. 그리고 자신들이 건너온 홍해의 물결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여호와는 나의 힘이시고 찬송이시며 그는 나의 구원이시다.”(출 15:2).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격해 하며 광야행진을 시작하였다. “여호와를 노래하라.이는 그가 정녕 자랑스러우시니 말과 그 기병을 그가 바다에 던지셨다”라고 노래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행진하였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백성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사흘 만에 저들의 입에서 찬송소리가 끊어졌고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물’때문이다. 저들은 매우 건조한 수르 광야지역을 행군하였기 때문에 목이 무척 말랐다. 드디어 3일 만에 ‘마라’(Marah)에 도착했을 때 샘물을 발견한 것이다. 한걸음에 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물은 너무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느 것이다. “쓴물이네!” 우물에서 일어서면서 물을 마실 수 없다고 모세에게 따졌다. 저들은 몹시 실망했을 것이다. 저들은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인가?”불평하면서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홍해를 건넜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입을 모아 ‘원망의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수없이 받았으면서도 환난과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너무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변덕스럽고 간교한 우리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게 된다. 우리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그만 고난이 나에게 닥치면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마라의 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르고 있었다.

출애굽기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칩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3일간 물이 없어 고통스러워할 때 만난 것이 마라이며, 이곳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고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이적을 보았다. 그리고 마라를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데로 갔는데, 그곳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놓으신 엘림이다. 엘림의 뜻은 “큰 나무”라는 뜻이다. 엘림은 샘물 12개와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비옥한 오아시스인데, 이는 완전수인 70(7*10)이 상징하듯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의 70장로를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서 지리학자들은 엘림을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현재 와디 가란델로 추정하고 있다. 엘림에는 목초도 있고, 모래가 많은 땅에 샘도 솟는 곳이 바로 엘림이라고 출애굽기 15장 27절에 기록되어 있다. 수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헤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에 도착하여서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준비한 오아시스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한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에 도착하고서 난 후 비로소 “조금만 더 왔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면서 후회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마라의 쓰디쓴 고통에만 머물지 말고 조그만 더 가면 엘림과 같은 위로와 은혜가 있으나 힘을 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마라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안락한 쉼터가 있는 엘림으로 인도하셨다. 이곳에서 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이후 처음으로 그들의 모든 피로와 긴장을 풀고 평온한 휴식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곳은 임시적인 휴식처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곧 다시 짐을 싸고 다시 고난의 광야 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엘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종 정착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엘림에서의 휴식은 단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가나안으로 향한 길은 고난으로만 점철된 길이 아니며, 그렇다고 편안하고 안락한 길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쯤 적당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시고, 또 휴식을 취해 안일에 빠지기 전에 가나안을 향한 고난의 길을 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백성들의 형편을 무시하고 몰아붙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성서의 땅 광야이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